얼마전, 나는 교회에서 정명석 목사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인터넷으로 순간 연결된 목소리가 얼마나 힘차던지, “아아!! 여러분이 멀리 있지만, 지금 제 앞에 여러분이 있습니다”라고 말씀을 시작했다. 나는 그 표현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말씀노트에 적힌 그 문장을 지금도 보고 있다. ‘멀리와 가까이’가 절묘하게 배치된 그 화법은 신비한 감동을 안겨준다. 멀리 있지만, 가까울 수 있다. 모든 관계가 그렇다. 하나님은 내게 얼마나 멀리 있고, 또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가깝고 먼 당신’이란 노랫말이 있는데, 남한과 북한이 그러했고, 보수와 진보가 그렇다. 항상 멀리 있다. 그러나 멀어도 가까울 수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해 포로로 붙잡혔던 존 매케인 정치인은 조지 부시와 버락 오바마에게 경선에서 패한 인물이지만, 미국 정치권에서 ‘정의로운 인물’로서 독보적인 존재다. 그는 이념을 존중하면서도 이념을 초월해 정의로운 목소리를 냈었다. 먼 관계에도 소신있는 정치를 펼쳤다. 멀고도 가까운 관계는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평행선은 없다. 바다에 펼쳐진 수평선이 직선 같아도, 우리는 과학적 상식으로 알고 있다. 그것이 곡선임을, 두 끝은 빙 둘러서 만드시 만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적대관계에 놓인 것 같으나, 실은 같은 한반도에 속했음을, 남한과 북한이 적대관계에 놓인 근본이유는 러시아와 미국의 이념전쟁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미 화해하고, 친구처럼 지낸다. 북한과 한국은 이제야 화해했다. 어쩌면 하나님과 사람도 상당히 가까운 관계인데, 인본주의자들이 멀게 만든 것이 아닐까?
“머리가 길면 무섭고, 짧아도 무서워요”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정명석 목사님 멘토링 말씀이다. 미용실에 가면 나는 항상 “길지 않고, 짧지 않게”라고 말하는데, 정명석 목사님이 ‘길지 않고, 짧지 않은 머리 스타일’을 설명했다. 마음이 무척 와 닿았다. 너무 길어도 무섭고, 너무 짧아도 무섭다. 이미지 효과로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귀신들이 머리가 대체로 길다. 수양버들처럼 길다. 그래서 무섭다. 머리 짧은 사람은 중이다. 중용(中庸)의 이치로서 적절한 가지치기는 ‘머리스타일과 옷차림’에 필요한 것이다.
본다(見)는 것. 그것은 2가지 의미가 있다. 示 와 視가 다르듯 見에는 내가 보는 것, 나를 보는 것의 2가지 의미가 존재한다. 나를 본다는 것, 화창한 오늘, 마음이 두근거린다. “멀리 있지만, 지금 앞에 있습니다”라는 그 문장이 메아리처럼 지금도 울려 퍼진다. 내가 있는 지금 이 까페도 하나님이 보고 있음을 믿는다면, 믿음이 현실이 될 것이다.
지난 4월 27일 월명동에 방문했을 때, 내려가는 길이 상당히 힘들었다. 길이 엇갈려 2시간 늦게 도착한 월명동에서 약수를 마시고, 카타콤과 같은 동굴속이 냉장고처럼 추워 급히 나왔던 그 때, 만난 한 사람이 있었다. 디자인 전공 교수님인데, 서정주 시인의 ‘국화꽃 옆에서’ 시처럼 하나님께서 서로 만나게 하려고 시간을 늦췄던 것인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감동적인 간증이었다.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 그 절묘한 시간의 일치, 내려가는 길이 힘들었으나 그 힘든 것도 모두 씻기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처럼 인생의 모든 일들은 ‘멀리 있지만, 앞에 있듯’ 고진감래(苦盡甘來)와 기다림의 미학임을 오늘도 시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