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進化論)은 진보(進步)로 오인된다. 착각이다. 진화(進化)와 진보(進步)는 다르다. ‘化’와 ‘步’가 다르듯 다르다. 둘을 같다고 생각하면, 백인 우월주의가 나오고, 나찌즘과 같은 파시즘이 탄생한다. 유대인의 선민사상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변질된 종교단체를 만들었고,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IS도 극단적 선민사상의 결과물이다.
진화론은 가지치기로 이해할 수 있다. 가지치기를 할 때는 반드시 가지끝의 몇을 남겨놓고, 나머지는 자른다. 오직 하나를 남기로 모든 것을 자르는 것이 아니다. 적자생존의 돌연변이설은 머리카락 한올만 남고, 모든 머리카락 빠졌다는 것과 같다. 대머리가 되었는데 어찌 머리가 나겠는가? 이치에 맞지 않다. 적자생존은 1등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패배했다는 모순에 빠진다. 과연 민주주의 시대가 1사람을 위해 부품이 되어야하는가? 군주민수(君舟民水)로서 왕이 백성을 다스림은 배가 물위에 있는 것과 같다. 물이 배를 뒤집듯, 지배와 피지배는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다.
진화는 쉽게 말하면, 개성의 변화이다. 나아갈 진(進)은 발전을 말한다. 화(化)는 변화이다. 즉,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한다. 이것이 진화의 핵심이다. 식물은 각 종류별로 다양성의 진화를 해왔다. 그처럼 사람은 살면서 개성의 진화 과정을 밟는다. 개성의 진화를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갈고 닦는 것이다. ‘새로움’이 곧 진화이다. 가지치기를 하듯이 불필요한 것을 없애고 새로운 형상을 갖추는 것이 곧 진화이다.
트럼프가 아무리 백인 우월주의와 미국 최우선의 가치를 내세워도, 미국 자체가 이미 다국적 사회이며, 달러를 찍을 수 있는 권한이 있을 뿐, 달러는 이미 세계의 기축통화로서, 세계경제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보호무역으로 폭탄관세를 트럼프가 부과하는 그 순간, 그것은 자국의 불이익이 되고 만다. 이 세상은 미국의 것이 아닌 것이다. 미국이 최고의 적자생존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미국도 영국의 압박을 피해 살아남으려고 도망쳤던 족속이 아니던가?
갈라파고스에서 다윈이 발견했던 것은 ‘다양성’이다. 환경에 적응하려고 모든 동물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변형했다는 것이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인생은 누구나 변화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이것은 나무가 생장점으로 뻗어서 성장하는 것과 같다. 특별한 종족만 살아남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선민사상은 종교적 적자생존 사상과 같다. 택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지나쳐서 상대는 택함을 받지 않았다는 경멸과 교만으로 변질될 수 있다. 위험한 사상이다. 히틀러가 유대인 대학살을 저지른 것이 마태복음의 예언을 성취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은 전쟁이다. 히틀러가 유대인만 학살했는가? 루터가 세운 위대한 종교혁명의 초석을 허물어뜨리지 않았던가? 종교의 종주국이 전쟁의 범죄국으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전쟁은 전쟁일 뿐이다. 진화론의 적자생존은 독일의 나찌즘으로 이어지며, 우월주의는 특권사상을 낳고, 괴이한 계급주의로 세상에 혼란을 야기시킨다. 매우 주의해야한다. 내가 소중하면, 남도 소중한 것이다.
나와 남은 ‘뇌와 몸’으로 비유할 수 있다. 둘은 별개가 아니다. 人이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해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있듯이, 나와 남은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여기서 ‘남’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다. 내가 소중하면 남도 모두 소중하다. 뇌가 몸 전체를 다스린다. 뇌가 몸을 통제하므로, 몸은 피지배에 속한다. 그래서 몸은 뇌의 희생양인가? 만약, 뇌가 몸을 그저 도구로 생각하고 버리면 버려지는 존재로 취급한다면, 뇌는 홀로 남겨져 죽음에 처하게 된다. 뇌는 몸없이 살 수 없다. 이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사회속에 존재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진화는 곧 다양성이 서로 어울어지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존재가 월등해서 전체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1%가 99%를 지배한다는 특권주의 사상은 맹점이다. 99%를 지배한다는 그 1%도 사실은 다른 측면에서 지배를 당하는 존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이 아무리 세상을 정보로 다스려도, 결국 사회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가지치기를 할 때, 가지 1개만 남기고 모두 자르지 않는다. 줄기만 남기고 모든 가지를 자르는 것이 아니다. 가지마다 그 끝을 남기고 불필요한 것을 자르는 것이다. 나무는 곧 사람이요, 가지치기는 그 사상이다. 자신의 모순을 가지치기하면, 그것이 곧 진화이며, 발전이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변화이며, 진화론이 추구하는 다양성의 적자생존을 이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