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은 두 얼굴의 사나이다. 앞면은 분노의 얼굴, 뒷면은 화목의 얼굴이다. 손바닥 뒤집기처럼 갈등의 뒷면을 볼 수만 있다면, 갈등을 덮지 않을 것이다. 갈등의 앞면은 지뢰, 뒷면은 보물이다.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몰라서 갈등의 유익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고전적 갈등관리방법으로는 갈등을 무조건 제거하기에 급급했다. 지뢰라고 판단하고 제거하면서 보물도 함께 버려진 것이다. 지뢰는 제거하면서 보물을 얻는 새로운 갈등관리방법을 몰라서 그런 실수가 벌어진 것이다.
갈등(葛藤)은 칡과 등나무의 얽힘이다. 둘은 성장의 방향도 다르고, 추구하는 목표가 달라서 헝클어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고전적 갈등관리에서 해석이다. 갈등은 복잡하고, 난해하고, 풀 수 없으므로, 칡나무와 등나무를 모두 뽑고서 다른 나무를 심자는 것, 혹은 칡의 뿌리를 분별해서 발본색원하는 것, 그것이 옛날방식의 갈등관리다. 식물은 칡과 등나무를 쉽게 구분할 수 있지만, 과연 사람과 사람의 갈등에서 누가 칡이고, 누가 등나무인가? 이럴 때, 상사가 등나무이고 부하는 칡일 확률이 높아진다.
관점을 조금만 변경하면, 우리는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다르므로, 상대적 칡과 등나무로 존재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난 것 자체가 이미 갈등관계이다. 유전자 구조도 갈등관계로 XX의 염색체가 뭉쳐있다.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다른 하나는 어머니로부터 와서, 둘은 서로 엉켜있지만, 헝클어져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섞이지도 않는다. 둘의 갈등은 제거대상인가? ‘나와 남’은 결단코 섞일 수가 없다. 형제끼리도 다른데, 나와 남은 얼마나 다르겠는가? 서로 달라서 ‘나’의 존재가 가치롭고, 또한 ‘남’의 존재도 가치로운 것이다. 갈등(葛藤)은 서로 헝클어졌다고 보면 그렇게 보이고, 서로 의지하면서 협력관계라고 보면 그렇게 보인다.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
문제의 본질은 ‘갈등’에 대한 인식관이다. 갈등은 “나쁜 것”, “독약같은 것”, “위험요소”, “빨간신호등”으로 인식하는 권위주의적 갈등관리 체제에서는 ‘갈등’은 간첩이다. 간첩이 출현했으니, 관리자는 즉각 경찰로서 출동해, 현장체포를 하고서 조직의 평화를 지켜야한다. 전형적인 갈등관리해결방법인데, 옛날방식이며, 지금도 자주 사용된다. 관리자와 경영자의 인식관이 옛날방식이어서, 지금도 그렇게 사용한다. 여기서 옛날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소통매체’가 발달하지 못한 시대를 지칭하며, 지금은 소통구조가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정보확산 속도가 빛처럼 빨라서, 갈등사건을 그냥 덮거나, 표면만 제거해서는 갈등의 근본을 해결할 수가 없다. 결국, 관리자의 인식관이 무엇보다 개설될 필요가 있다.
생각해보자. 화목이 좋은가? 평화가 유익한가? 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왜 촛불을 들고 눈물로 울부짓었는가? 왜 4.19 혁명에서 민중은 분노했는가? 왜 독립투사들은 목숨을 걸고서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서 싸웠는가? 평화로움이 존중받아야한다면, 화목이 조직의 최우선 가치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저 개미처럼 숨죽이고 사는 것이 상책이다. 요순시대 ‘태평성대’(太平聖代)가 지금 펼쳐진다고 스스로 자위하면서, 화목의 표정을 가지면 그만이다. 조직이 화목하면, 그 조직은 죽은 조직이다. 갈등없는 조직은 발전이 없는 조직이다.
루터가 갈등대신 평화를 선택했다면, 종교체계에서 중세사회는 더 지속되었을 것이다. 1사람의 갈등선언이 모두의 내면을 폭발시켰다. 그 덕분에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이단자, 추방자, 마귀의 판결을 받았다. 구원이 교황으로부터 주어진다면, 루터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래서 루터는 구원이 예수님으로부터 온다고 선언했고, 교황은 구원받을 자격이 부족하다고 선언해버린다. 과연 보다 진리에 기초한 것은 교황인가? 루터인가?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오면서 밥먹듯 전쟁을 했던 인류에게 갈등은 ‘죽음과 노예’의 이미지가 강했고, 그러한 역사는 인류문명에 지금까지 흘러내려왔으니, 인간은 누구나 갈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강할 수 밖에 없다. 6.25만 보더라도 남북한 갈등으로 인해서 피해는 한민족에게 떨어졌고, 혜택은 일본에게 돌아갔다. 일본국은 전범국의 딱지를 뗐고, 북한은 지금껏 폭력국가로 낙인찍혔다. 지나고 보면, 남북한의 갈등도 당사자끼리 대화로 풀 수 있도록 중국과 미국의 강대국이 적극 주선하면 되는데, 그들은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의 영토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중국은 한반도를 중국의 영향력에 있다고 보고, 미국은 한반도가 미국의 통제속에 있다고 판단하니, 갈등의 근원뿌리는 미국과 중국에게 있는 것이다. 갈등의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이 오히려 갈등을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형국이니, 이 갈등은 쉽게 끝날 수가 없다.
어쨌든, 핵심은 갈등이 부정과 긍정의 두 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건에서 그러하다. 한쪽 면만 쳐다보면, 오류가 발생한다. 갈등은 조직 내부의 해결되지 못한 어떤 문제를 알려주는 신호일 수도 있다. 갈등은 단지 갈등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무도 그 뿌리가 땅속에 박혀 있듯이, 갈등의 나무도 그러하다. 연결된 다른 갈등의 뿌리가 존재하며, 갈등을 추적하다보면, 그곳에 조직의 발전을 방해한 근본 폐단이 발견될 수 있고, 혹은 조직의 차원을 높일 수 있는 근본 해결책이 제안될 수 있다. 무조건 갈등을 제거해서 덮으려는 방법, 갈등을 은폐하고 조작해서 덮으려는 방법, 그것은 갈등을 방치해서 병을 키우는 가장 나쁜 갈등관리방법이다. 덮힘으로 방치된 갈등은 조직을 무너뜨리는 핵폭탄으로 폭발할 수도 있다. 갈등은 드러났을 때, 그 때 갈등당사자와 함께 자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갈등관리 프로그램이 진행되어야한다. 이것이 갈등조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