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야 까페다. 소쩍새처럼 안경을 쓴 통통한 알바생이 내 주문을 받았다.
“까페라떼와 머핀, 치즈로 줘요”
“예~~ 5천2백원입니다”
나는 6천원을 줬다. 한참 있다가, 그 알바생이 내게 5200원을 줬다. 기억을 곰곰이 생각해봐도, 내가 받아야할 거스름돈보다 많았다. 내가 웃자, 그 알바생도 웃는다. 5200원이 맞긴 맞는데, 그제서야 사칙연산에 실수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 제가 800원을 드려야죠?”라면서 미안해했다. 내가 그냥 가져왔으면, 내 마음에 5천원 지폐가 묵직하게 짓눌렀을 것이다.
내 것 네 것, 늘상 거기서 사람들은 갈등하고 고민한다. 내가 받을 돈인가, 내가 지불할 돈인가, 거기서 사람들은 헤깔린다. 상속세를 낼 것인가, 말 것인가? 계약금을 낼 것인가? 말 것인가? 늘상 고민한다. 받을 것인지, 줄 것인지…..
성경은 이런 갈등에 대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명쾌한 법률로서 답을 제시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는 것은 돈을 가진 자의 판단에 따른다. 성경을 쓸 그 당시, 기독교인이면서 이스라엘 민족이었던 사람들은 항상 로마에 내는 세금을 놓고 갈등했다. 예수님이 생존했을 때, 십자가 사건이후, 늘상 갈등했다. 민족은 당시 로마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 있듯 그러했다. 로마에 세금을 내려고 하니, 민족의 반역자가 된 것 같고, 로마에 세금을 내지 않으려니, 탄압을 받을 것 같고…… 성경은 2가지 법률을 말한다. 하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구분하라는 것, 다른 하나는 성전세 납부에 대한 것이다. 성전세 납부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7장에서 ‘면제대상’이라고 말하면서도, “괜히 분란을 만들지 않으려면 그냥 내는 것이 좋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 사건이 베드로와 물고기 사건이다.
반세겔은 5만원 정도 된다. 1년에 5만원 정도 성전세가 나왔었다. 마태가 십자가 사건 앞에 그 내용을 첨부했는데, 과연 ‘성전세 납부’에 대해서만 거론했겠는가? 성전세 납부처럼,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제사를 지낼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런 것처럼….. 마치 추석때 성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런 것처럼….. 사람이 살다보면 원치않는 다양한 사건을 직면할 때가 많다. 그때 과연 어떻게 해야하나? 그런 갈등은 늘상 내재한다. 그때마다 나는 2가지 성경 사건을 생각한다. 하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그 성경구절이다. 다른 하나는 ‘베드로와 물고기’ 사건이다. 하지 않아도 되지만, 혹시 상대가 오해할 상황이 생긴다면, 그것이 큰 부담되는 일이 아니라면, 해주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거스름돈 8백원 대신에 5200원을 받은 오늘 이디야 까페, 행복한 계산착오였다. 돌려줬지만, 받은 것보다 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