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5월 24일 월명동 돌조경 건축현장을 봤다. 돌위에 돌을 올리는 작업이다. 타워 크레인은 멈춰 있었다. 돌조경 건축가들이 건축지시를 받고 ‘OK’ 신호가 떨어지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품 돌은 크레인에 밧줄로 꽁꽁 묶여서 공중휴거가 되었다. 들어올림(携擧)의 휴거가 문자 그대로 타워 크레인의 줄에 의해서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정확히 지시한 그 바위위에 작품 돌이 올려졌다. 먼 거리는 무전기로 신호를 주고받고, 정확한 위치와 각도가 맞는 그 순간, ‘OK’가 내려졌다. 화룡점정!!!
사람의 팔이 무슨 힘이 있을까, 생각하겠지만 그 팔로 ‘OK’ 사인을 내리면, 타워 크레인 운전수가 팔로 운전을 시작한다. 타워 크레인의 거대한 팔이 움직여서 바위를 옮기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수아 군대가 전쟁을 할 때, 여호수아의 팔이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게 하는 것과 같고, 모세가 신광야에서 전쟁할 때 그의 팔이 내려오지 않았던 것과 같다. 팔이 올라감으로 깃발이 펄럭이듯 하나님의 능력이 크레인처럼 함께 했던 것이다.
크레인 운전사 관점에서는 “내가 돌을 옮겼다”라고 말할 수 있고, 바위위에 있는 건축가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돌을 놨다”라고 말할 수 있고, 무전기로 최종 지시를 내리는 전달자 입장에서는 “내가 돌의 위치를 지정했다”라고 말할 수 있고, 크레인 입장에서는 “기계의 능력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 조감도처럼 위에서 내려보는 관점에서는 “모든 구상은 하나님이 행하셨다”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전도는 이와 같다. 모두가 협력해서 어느 한쪽이라도 없어서는 안된다. 지시를 내리는 시작점과 지시대로 크레인을 움직이는 실행자와 작품돌을 직접 만지는 건축가들이 모두 공동의 협동체가 되어야 가능하다. 사도 바울이 이와 관련해 오묘한 비유를 표현했다.
[고린도전서 3: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亞波羅算甚麼.保羅算甚麼.無非是執事、照主所賜給他們各人的、引導你們相信。我栽種了、亞波羅澆灌了.惟有 神叫他生長。可見栽種的算不得甚麼、澆灌的也算不得甚麼.只在那叫他生長的 神。栽種的和澆灌的都是一樣.但將來各人要照自己的工夫、得自己的賞賜。因為我們是與 神同工的.你們是 神所耕種的田地、所建造的房屋。我照 神所給我的恩、好像一個聰明的工頭、立好了根基、有別人在上面建造.只是各人要謹慎怎樣在上面建造。因為那已經立好的根基、就是耶穌基督、此外沒有人能立別的根基。
그렇다면 크레인의 거대한 팔은 무엇일까? 긴 줄은 또한 무엇일까? 돌조경 건축현장에서 돌보다 더 거대하게 자리를 차지한 크레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한다. 신앙생활을 할 때는 믿음으로 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휴거(携擧)는 끌어올림이다. 생명이 끌어올려져서 생명의 주관권으로 옮겨지는 근본의 능력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단지, 사람은 기도조건, 강의조건, 인도조건, 관리조건, 분위기 조건을 세우는 것이다. 크레인 없이 돌조경 건축을 누구도 할 수 없다. 크레인의 능력은 모든 사람의 수천배, 수만배에 달한다. 생명전도에 하나님의 행하심이 가장 큰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전도에 있어서 협력한 동역자들의 수고를 서로 알아주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작은 사람들의 협력 조건을 토대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크레인처럼 움직여서 생명이 주관권을 바꿔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보이지 않음으로 사람이 행한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교회 가요. 월명동 가요. 말씀 배워봐요”라고 권유할 때, 그 작은 행위를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크레인처럼 움직여 생명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이다.
생명은 자연석보다 귀하다. 바위보다 무거운 고정관념이 바뀌는 인식관의 이동경로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사도 바울이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했듯이, 크레인이 돌을 결정적으로 옮기듯 하나님이 생명을 전도한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때, 생명전도의 새로운 눈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