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일기예보의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 ‘노아’다. 그는 10년후 메소포타미아에 밀려올 대홍수의 자연재해를 예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대비했던 인물이다. 그것이 노아의 홍수심판 사건이다. 그 홍수심판으로 메소포타미아 일대 모든 주민들은 몰살했고, 노아와 가족들만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 담긴 그 사건은 창세기 6장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마을의 친구들, 직장 동료들, 죽마고우들, 정든 놀이터, 고향의 흔적까지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다행스러운 것은 노아를 중심으로 부인과, 자녀들과 며느리들은 살아남은 것이다. 또한 노아가 기르던 가축들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홍수는 자연재해이다. 그런데, 그 자연재해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때는 ‘말씀의 사역자’로서 심판을 행하시니,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자가 없다. 자연재해를 막는 것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이 되버린다. 이와 같은 사건은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났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노아의 마을에서는 하나님께서 홍수의 자연재해를 통해서 그 마을 전체를 심판했다. 소돔과 고모라는 화산의 자연재해를 통해서 심판하셨다. 심판의 근본 이유는 ‘이성적 문란과 향락의 퇴폐문화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문화적 발달‘이다.
혹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발달된 문화가 왜 심판을 받아야하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자연재해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하나님께서 감행하시는 것이다. 만약 멧돼지가 출몰하면 농부는 행정기관에 민원을 제기해서 멧돼지 사냥을 할 것이다. 멧돼지 입장에서는 단란한 신혼생활을 하면서 멧돼지의 번식과 번영을 위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데, 왜 자신들을 살해하고 몰살시키며 사냥을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다. 인간의 농사를 방해해서 그렇다. 토끼 사냥을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호랑이 사냥을 하지도 않는다. 호랑이가 인간을 잡아먹는다면 그때는 호랑이 사냥을 할 것이다. 호랑이는 동물들을 잡아먹으면서 인간과 격리된 산속에서 살아가니, 피해를 입지 않은 인간은 호랑이에 대해 민원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심판을 할 때는 하나님의 역사에 큰 피해와 손실이 발생할 때 감행하신다. 그 사건이 바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홍수심판과 소돔과 고모라 지역의 화산심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어긋난 것은 여건을 틀어서 막으신다. 반면 하나님의 뜻이 있을 때는 반드시 돕고 함께 하신다. 노아가 배를 만든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10년동안 노아가 배를 만든 장소는 산(山)이다. 아라랏산 위에서 노아는 배를 만들었다. 협조자는 겨우 자식들 셋 정도 였으니, 가족들의 불만과 불평이 얼마나 가시나무였겠는가. 그러한 역경을 견디면서 10년동안 배를 만들었더니, 결국 그 지역에 홍수의 자연재해서 몰려왔던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뜻이 있을 때는 산에서도 배를 만드는 역사가 일어나고, 그 배가 결국 유일한 생명선이 되도록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반면, 뜻이 아닌 것은 모두 멸해버리신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명자의 말씀을 들어봐야한다. 사명자의 말씀속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노아와 친분이 있는 가축은 모두 살아남았지만, 노아를 반대한 사람들은 모두 멸절당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람과 상관이 있는 가축은 배를 탈 수 있고, 상관이 없는 마을 주민들은 배를 탈 수가 없었다. 배를 타는 것이 구원이고, 배를 타지 못하는 것이 심판이다. 구원의 문이 곧 노아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홍수’를 자연재해라고 보통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흘러간다. 자연재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연을 대비하고, 자연의 변화에 몰입한다. 반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혹시 그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과 생활속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이 무엇인지, ‘이성적 문란과 죄악’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회개를 해서 하나님의 칼날이 내려올 때 눈물의 회개로 고개를 숙임으로 심판을 모면하게 된다. 회개하는 자는 심판의 칼날이 머리위로 지나가고, 회개하지 않고 교만한 자는 심판의 칼날이 목을 지나간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는 반드시 고개를 숙여서 눈물로 자복해야 그 영혼이 생명을 얻는다. 그것이 지혜이다.
창세기 11장에는 자연재해를 막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바벨탑 사건이다. 이 사건의 핵심은 사람의 마음중심을 보는 하나님이다. 자연재해를 막는 것은 인간의 기술을 발달시키고, 사람으로 해야하는 문명의 위대한 정신이다. 그러나, 그 중심에 하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을 뜻을 거스리는 마음이 들어있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으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생활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존경쟁을 한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도우신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다보니,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허물어뜨렸다. 그들은 자연재해인 홍수를 대비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았다. 홍수가 밀려오는 것보다 더 높이 쌓으면 홍수에도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맹점은 홍수가 일어난 본질을 모른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했겠는가? 하나님은 언어를 틀어지게 해서 바벨탑 공사를 중단시켰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닌 것은 소요가 일어나게 하고, 분란이 일어나게 해서 막으신다. 서로 마음의 언어가 달라지고, 심정이 상하면서 틀어지면,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법중 하나이다. 바벨탑은 곧 교만을 말하고, 자기중심의 상징물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악한 것을 뜻한다. 훗날 요한 계시록에서는 바벨탑이 있던 지역의 바벨론을 ‘절대악의 상징’으로 표현했다. 바벨탑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본주의 상징물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2가지 방법, 돕고 협력해서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과 틀어져서 중지시키는 것을 반드시 알고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산다면 그 삶이 신본주의적 삶이 되어서 만사가 편하다. 혹여, 자신이 속한 그 일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벨탑과 같다면, 하나님은 흩어지고 틀어지고 공사를 중단시킬 수도 있다. 바벨탑은 무너뜨러야 그 사람에게 유익이니, 불필요한 바벨탑을 쌓지 않게 하나님은 도우시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알지 못하고, 바벨탑을 끝까지 추진하려는 자가 있다면 그 또한 무지하고 미련한 자에 속할 것이다.
창세기 11장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