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오늘도 나의 생각을 주님께 조용히 아뢰었다. 삶의 마찰력은 여저히 거세므로, 하나님의 의향이 어디에 있는지 마음의 고막을 기울이며 하나님께 대화하였다. 언제나 깨달음 ‘나의 주관’을 버리는 것, ‘주가 함께 하시는 것’을 귀결되었다.
“아!!!”
“고통은 고장나서 그래요. 참아요.”
내가 처음 불 마사지(라이터를 이용한 신경 자극 요법)를 받았을 때 사건이다. 내가 지금 글을 쓰는 이곳, 톰앤톰스에서 양말을 벗어보라고 한 그 스포츠 마사지 전문가가 내 엄지 발가락의 위쪽을 자극했을 때 나는 소리를 질렀다. 누를 때마다 엄청난 통증과 고통이 엄습했다. 차라리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맞는 것이 덜 아플 정도다. 모든 압력이 엄지 발가락 위쪽을 향하면서 통증을 야기시키는데, 불평이 화산처럼 폭발할 지경이었다. 놀랍게도 그러한 고통이 지나고, 몇분 후 내 엄지 발가락은 정상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엄지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지금껏 완전 무결하다.
자기 주관, 자기 교만, 자기 고집, 자기 전통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이유는 ‘개성 진리체’라서 그렇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유일하게 자아 정체성과 자유의지를 허락해서 그렇다. 자아 정체성과 자유의지는 두뇌활동을 통해서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높은 지성의 연산작용을 줬다는 것이다. 연산 작용이 계산기 수준이면 하나님과 자신과 우주에 대해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엄청난 슈퍼 컴퓨터 수준의 연산작용이 가능하므로 우리는 자아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신념과 고집은 같다. 집념과 아집은 같다. 일편단심과 고정관념은 같다. 충성과 보수는 같다. 전문가와 외골수는 같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신념과 고집이 하나님의 생각과 부딪힐 때다. 그때는 고집을 꺽어야 더 큰 고집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품게 되면, 결정적인 상황에 하나님과 의견이 충돌하면, 그것이 흑암이요, 사탄이요, 루시퍼다. 신앙인으로서 가장 경계해야할 것이 이것이다.
‘나쯤이야~~’
이런 마음이 모두에게 있다.
‘지금 쯤이야!!’
모두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 내게도 그러하다.
그러나, 예수님조차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그러나 저의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시고, 3번이나 제자들을 흔들어 깨우면서 함께 기도해달라고 간청했다. 나중엔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제자들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십자가 길을 걸어가시고, 2천년 신약역사의 주인공이 되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로 가나안에 정착했으나, 여전히 경제는 궁핍하였고, 여전히 자녀는 없었고, 여전히 삶은 사막처럼 퍽퍽했다. 게다가 동역자 롯과 분쟁까지 발생했으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하였겠는가. 아브라함을 따르는 자들은 평안했는데, 아브라함 본인은 그다지 평안하지 못하였고, 이집트로 옮겨서 생활을 해야할 정도로 어렵게 생활했다. 훗날 늦둥이 이삭을 얻었으니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하나님의 은혜요, 기쁨이요, 사랑이었으리라. 하나님은 그 이삭을 바치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였고,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어린 나이였지만, 믿음으로 두려움을 견뎠으리라. 과연, 아브라함에게 아버지로서 애정이 없었겠는가.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던 것이다.
고집의 대명사로 사도 바울이 있다. 사도 바울은 기혼자(旣婚者)였다. 산헤드린 의원은 결혼과 자녀 조건이 필수였다. 사도 바울은 산헤드린 의원으로서, 훗날 기독교인 체포영장을 대제사장에게 받아서 의기양양 다멕섹으로 출발하였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영적으로 만났고, 예수님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바울이 행한 그대로 갚아 주셨다. 바울은 시대를 내다보지 못하였고,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였으니, 율법에 갇힌 소경이었다. 그래서 ‘시신경’(視神經)을 때려서 앞을 볼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엄청나게 강한 빛을 비춤으로 시신경에 마비 증상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기도를 받으면 그때 치료가 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그때 사건을 기점으로 유턴했다. 그리고 더 큰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하나님의 진리안에서 신념과 의지와 고집과 아집을 가졌다. 그래서 유대인이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 사도 바울이 되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예수님과 충돌해서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면, ‘핍박자 바울이 다멕섹에서 소경이 되어 병들어 죽었더라’라고 성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인생의 운명은 극과 극으로 나뉜다.
“이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 신을 벗어라”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모세는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시로 전했을 것이다. 모세는 교만을 벗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출애굽의 표적을 일으키면서 대탈출의 영웅이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따르는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결국 약속받은 가나안을 지척에 두고서 들어가지 못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이다. 40년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신광야를 헤맸다. 40년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근육을 키우는 기간이었다. 자기 교만, 자기 생각을 벗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날마다 자신을 살피면서 신앙에 성공해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귀한 인물로 사용하시리라.
나는 고등학교 때 ‘내가 죄인됨’을 깨달았다. 진리 말씀을 깊게 들었더니, 그 진리의 말씀이 내 가슴속을 파고 들었다. 강사님은 유대인의 무지를 개탄하였으나, 그러한 비판이 내 마음속을 파고들고, 나의 모든 과거가 생각나면서 나의 죄인됨을 뉘우치고, 스스로 회개하면서 진실한 신앙인 되려고 새벽기도를 그때부터 시작하였다.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나는 나의 교만을 서서히 벗었고, 내가 얼마나 틀렸고,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미련한지, 오랫동안 숙성하였다. 결국, 정명석 목사님의 진리가 내게 죄와 의를 알려주었고, 내가 살아가야할 영원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나는 대학교 졸업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다. 그때는 진리의 말씀을 더 직접적으로 내게 전해준 분이 있었고, 내 삶의 척추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정확하게 지적해준 그 분의 극적인 손길을 의지하여, 나는 신앙이 부활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내가 틀린 방향으로 갈 때마다 하나님은 나의 방향을 틀으셨고, 내가 옳은 방향으로 갈 때마다 하나님은 내게 도움의 손길을 주셨다. 나의 하나님이 오늘도 내게 함께 계시길…. 작은 불평도 큰 원망도 모두 버리고, 오늘도 나와 내가 믿는 시대 사명자와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