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건강칼럼 / 장창훈]=무의식 신경구조를 알지 못하면, 인생은 참으로 불편하고, 의식 신경구조를 간과하면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 둘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며, 의식 신경구조는 중앙통제 방식의 질서이며, 무의식 신경구조는 지방분권의 말초신경의 자유로운 활동이다. 둘의 관계가 상호 인정을 하지 않으면 균형은 무너지게 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머리는 손끝 발끝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손끝 발끝은 현장이고, 머리는 책상위다.
나는 나를 믿고 일을 진행하는 사람과 신뢰의 근육과 신경망을 형성한다. 약속과 신뢰는 같다. 상호존중도 동일하다. 불신과 통제는 근육을 강제하면서 신뢰의 축이 무너질 때가 많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이는 것이 아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듯 그렇다. 신뢰에 금이 가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그 어느 날 틈이 드러난 것이다. 그날 그 사건이 있기 전부터 서서히 신뢰의 금이 생기는 것이다. 결국, 잘되는 것은 ‘작은 잘됨’의 적분이고, 무너지는 것도 ‘작은 실수’의 연속선이다.
김세연 박사를 통해 새롭게 발견된 무의식 신경의 역할은 신비롭다. 생물시간에 이론적으로 설명된 것이지만, 무의식 신경이 인체구조학의 붕괴와 직접 상관이 있다는 이론적 논거는 오랫동안 기억의 잔상에 남아 있다. 발가락 마비증상이 결국 걸음의 불균형을 야기시켰고, 걸음의 불균형은 척추와 경추와 두뇌의 혈액공급까지 영향을 미치며, 허리를 굽게 하고, 갈비뼈의 공간 축소로 말미암는 호흡부족과 간경화 현상이 유발된다. 이러한 모든 연결구조는 사소한 근육 하나, 즉 엄지 발가락의 무의식 신경계의 고장 때문이다. 고장났어도 고장난 것을 모른 결정적 이유는 무의식 신경계라서 그렇다. 이것이 김세연 박사의 핵심 주장이다. 나는 전적으로, 100% 동감하고 지지한다.
무의식은 의식을 못한다는 것이고, 의식하지 않는 신경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뇌의 입장에서는 ‘알지못하는, 의식하지 못하는 신경의 활동’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무의식 신경의 반응은 즉각적이며, 0.3초의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이후 의식 신경계가 뒷받침을 한다. 그래서 사람은 무의식 신경계가 움직인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순간의 반응, 빠른 움직임, 무의식적으로 느껴지거나 반응하는 것은 모두 두뇌의 허락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두뇌의 허락을 받게 되면, 무의식 신경계는 존재 가치가 없어진다. 손끝 발끝은 매우 빠르게 생존해야하므로, 그러하다. 내장기관은 무의식 신경의 자율신경계의 통제를 받고서, 두뇌와 상관없이 움직인다. 그와 같이, 무의식 신경계에 의해서 움직이는 세포들이 많다.
무의식 신경들이 활동한다고 해서 그것을 통제하면, 무의식 신경들은 굳어서 활동을 못하고, 그러한 무감각은 결국 인체를 점점점 병들게 한다. 사람의 관계도 그렇다. 무조건 모든 것을 알아야한다는 사고 방식은 중앙통제식 철권통치로서 의식구조의 강한 구조이다. 이러한 방식은 자율신경의 자유로움에 경직을 주고, 부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것은 자율신경이며, 무의식 신경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로운 사회이며, 법치국가이다. 법치는 곧 중앙통제식이고, 자유민주는 자율신경이다. 둘은 상호 존중되어야 국가와 사회가 유기적으로 살아서 움직인다. 자유민주가 배제된 법치는 ‘군대’가 되고, 군대의 확대는 곧 공산주의 체제이다.
모든 이치가 그러하다. 그래서 서울교육방송은 제보가 들어오거나, 논설위원이 글을 보내오면, 근거없는 비판만 아니라면 내용수정없이 대부분 보도가 되도록 한다. 언론은 자유로워야하고, 언론은 자율적이며, 언론은 다양한 의견을 표현할 수 있어야하므로 그러하다. 자율성은 튼튼한 신뢰의 근육안에서 가능함을 확인하며, 무의식 신경계가 없는 의식 신경은 점점점 속도가 느려지고, 힘이 약해지며, 불균형이 발생함을 인지하고, 사람과 관계도 그러함을 안다면 보다 생동감있는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