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속에서 ‘사랑’의 말을 사용하면, 그 사랑은 육체의 사랑으로 인식된다. 그것을 알아야한다. 상대에게 “왜 오해했냐?”고 말할 수 없다. 상대를 오해시킨 것은 자신이다. 상대는 ‘사랑’을 ‘육체의 사랑’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그 개념으로 사랑을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 본문중에서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오늘 새벽도 정명석 목사님은 “개성적 사랑의 승리를 하라. 각각 자신의 사랑의 길을 걸어가라. 이성적 사랑은 너무 낮다. 개성적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말조심, 입조심하라”고 강하게 말씀했다. 아멘!!!
언어는 이중성이다. 모호하다. 언어의 속성 자체가 이미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그 사랑은 각자의 개념으로 인식한다. 우리가 “어머니”라고 말하면, 각자의 어머니를 생각하듯 그러하다. 보통명사도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초콜릿”이라고 말하면, 연인과 노인은 각자 전혀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고, 당뇨병 환자와 아이들도 초콜릿에 대한 느낌이 각자 다르다. 일반명사도 그러한데, 하물며 추상명사랴!! 사람에 대한 것도 동일하다. 박근혜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도 동일 인물이지만, 각자 느끼는 이미지는 전혀 다르다. 같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단어 사용을 잘해야한다. 우리가 우상숭배자로서 ‘까마귀’를 비유하지만,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효조’(孝鳥)다. 중국인에게는 우상숭배자를 까마귀로 비유하면 통하지 않는 법이다. 이처럼 언어사용은 상대적이다. ‘사랑’도 상당히 잘 사용해야한다.
2천년 전이다.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이 숙청당했다. 숙청당한 이유는 2가지였다. 하나는 근친상간(近親相姦)이고, 다른 하나는 식인종교(食人宗敎)였다. 기독교인들은 서로를 동등권으로 형제와 자매로 호칭했는데, 그것이 같은 식구 개념으로 인식된 것이다. 사회에서 바라보는 인식관이 이처럼 무섭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근친상간을 하는 종교로 여겨졌다. 또한 사람을 잡아먹는 종교로 인식되었다. 예수님이 “내 피니 마시라, 내 살이니 먹으라”고 했던 성만찬식 때문이다. 그 비유를 실체로 인식했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비유로 인식해서 이해하지만, 단어 자체는 다른 의미로 해석되면서 초기 기독교의 선교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사회적 인식까지 동시에 고려하지 못한 성만찬식 단어 사용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300년이 흘렀으니, 얼마나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겠는가. 하물며 이 시대랴!!!
교회에서 “사랑”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아가페적 사랑으로 동격 취급을 받지만, 현대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거룩한 사랑을 하는 순결한 단체가 너무 부족해서 그렇다. 사회속에서 종교가 존재하므로,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도 명확하게 써야한다. ‘존경’과 ‘사랑’은 단어만 다를 뿐, 같은 의미다. 사회에서는 사랑의 개념이 ‘육체의 사랑’으로 이미 고착된 상황이므로, 잘 사용해야한다. 한국에서 만약 “동무, 잘 있었소”라고 말하면, 북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동무는 친구의 뜻인데 그렇다. 그와 같이 신앙인이 사회속에서 ‘사랑’의 말을 사용하면, 그 사랑은 육체의 사랑으로 인식된다. 그것을 알아야한다. 상대에게 “왜 오해했냐?”고 말할 수 없다. 상대를 오해시킨 것은 자신이다. 상대는 ‘사랑’을 ‘육체의 사랑’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그 개념으로 사랑을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차라리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쓰던지, 혹은 ‘진실한 존경심’으로 표현하던지, 완전히 구별해서 사용해야한다. 그래야 상대는 인식한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었다. 그때 제자들은 너가 높냐, 내가 높냐라고 예수님을 괴롭혔다. 어떤 제자들은 예수님의 작은 엄마를 데려와서 압박했다. 야고보와 요한이다. 상황이 이렇게 흘렀으니, 서로 발꿈치를 들고서 키를 높이려고 하는 그 상황에 예수님은 발바닥을 씻겼다. 가장 낮은 위치에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이 시대도 그러했으리라.
발꿈치는 땅을 지탱하는 디딤돌인데, 들면 발병이 걸린다. 발꿈치를 드는 경우는 하이힐을 신거나, 소아마비에 걸린 장애인의 경우다. 발꿈치를 계속 들고 있으면 발바닥 앞쪽으로 땅을 디뎌야하므로 결국 족저근막염에 걸리고, 무지외반증에 시달리게 된다. 발은 망가진다. 발은 발뒤꿈치가 땅에 디디면서 발의 아치가 탄성력을 발휘하고, 엄지 발가락이 버티는 힘으로 걷게 된다. 이러한 모든 힘이 상실된 것이 발뒤꿈치를 드는 것이다. 오직 머리는 그리스도요, 나머지는 지체로서 섬기는 것이다. 목도 머리를 섬긴다. 심장도 머리를 섬긴다. 다리도, 무릎도, 발목도, 발도, 손도 머리를 섬긴다. 모두 개성적으로 머리를 위해서 각자의 위치에서 섬김으로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발이 손이 되려고 하면, 손이 심장이 되려고 하면, 무릎이 팔꿈치가 되려고 하면, 그것은 장애인이다. 오른손도 왼손이 될 수 없다. 각자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함으로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나의 위치에서 진실한 사랑의 길, 진리의 길을 걸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