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공산주의는 공유관계와 거의 동일하다. 가장 작은 공산주의는 부부공동체이며, 가족공동체이다. 요즘 젋은 부부는 공산주의 시스템을 취하지 않고, 부부 독립 재산제를 취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공산주의 시스템은 ‘함께 더불어’의 의미가 강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은 ‘각자, 나눠서’가 강하다.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고, 재산의 분배 과정이 어떠하냐로 달라진다.
공산주의(共産主義)는 함께 생산한다는 개념이다. 함께 생산해서, 함께 배분하는 것이다. 과거 농업중심 사회에서는 공산주의 개념이 매우 적절했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밭, 자식들이 모두 공동으로 일을 했고, 농사를 통해 얻은 이익으로 함께 밥을 먹었다. 분배는 곧 ‘식사’와 ‘집에서 숙식’이었다.
현대사회는 핵가족 시대다. 자녀가 2~3명이다.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부모가 교육비를 전적으로 책임지며, 자녀의 양육도 책임진다. 벌기는 부모가 버는데, 쓰기는 자녀가 쓰고, 또한 부모도 사용한다. 남편이 직장에서 벌면, 식사준비와 살림살이는 아내가 한다. 버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각각 다르다. 어떤 남편은 벌어온 월급을 아내에게 맡기고, 용돈을 타서 생활한다. 공산주의 시스템이 적용된 것이다. 재산의 분배과정을 서로 합의하고, 사랑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다.
공산주의 시스템은 상황에 따라 효율성이 매우 탁월한데, 때로는 부작용이 심할 수도 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공산주의 시스템이 좋다. 자녀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에만 쓰므로 작은 용돈으로도 충분하다. 자녀들이 직장에 다니면서 벌어드리는 수익이 부모보다 많다고 하자. 이때는 공산주의 시스템을 적용할 수가 없다. 부모는 한달에 200만원을 벌고, 자녀는 한달에 500만원을 버는데, 모두 가족에 반납하고서, 부모가 정한 기준에 따라서 분배를 해야한다면, 자식들은 동의하지 않고, 분배하는 규칙과 기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가족공동체에서 독립을 하게 된다. 이처럼 자녀의 성장에 따라 가족의 공산주의 시스템이 적용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 마마보이는 자녀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시스템을 계속 적용하면서 자녀의 사회성을 말살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공유지분(共有持分)은 함께 공동으로 지분을 갖는 것이다. 땅은 하나인데, 모두 분수(1/N)로 가지고 있어서, 땅의 사용에 있어서 과반수 이상을 가진 지분권자가 권한을 행사한다. 과반수 이상을 가진 자가 가족의 입장에서 부모에 해당한다. 나머지 지분권자는 과반수 이상을 가진 자가 원하는 방향을 무조건 따라야하고, 분배기준에 따라서 이익을 받아야한다. 반면, 공유관계가 끝나고 지분이 쪼개지면,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고, 각자의 독립된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과 같다. 독립하면, 기존의 공동체는 탈피한다.
공산주의 시스템이 가족에 적용될 때는 성공확률이 높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숫자가 적어서 그렇다. 부부끼리는 공산주의 시스템, 함께 벌어서 함께 나눠먹는 것, 맞벌이 부부들이 그렇게 한다.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가. ‘나눔과 사랑’으로 가장 아름다운 제도임에 틀림없다. 가족에 한해서 적용되는 특수한 철학이 바로 공산주의 시스템이다.
반면, 공산주의 시스템이 확대되면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분배기준이 모호하고, 분배의 변수가 무한대로 늘어나서 그렇다. 절대적 기준을 만들 수가 없다. 수천만명에게 재산을 나눠주는데,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배분할 것인가? 배분하는 계급인 공산당은 이미 권력자가 되버린다. 가족에서는 부모가 배분권자인데, 부모가 항상 더 많이 생산해서 자녀에게 나눠주므로 자녀는 불만이 없다. 반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벌고, 공산당은 벌지 않는다. 공산당은 오로지 재산을 분배하는 역할만 한다. 버는 자는 굶고, 분배하는 자는 배가 부르다. 공산주의 사회는 오로지 특권층만 배부른 피라미드 사회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공산주의 시스템을 취했다. 사도행전에 보면 자세히 나온다. 베드로가 모든 성도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 공동체에서 그것을 관리했다. 집사들은 성도들의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함께 더불어 집단 생활을 하면서 공동체를 꾸려 나갔다. 성서는 말하길, 해당 시스템은 결국 노숙자를 만드는 제도라고 비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베드로가 만든 교회 공동체를 난절하게 비판했다. 교회가 공산주의 시스템을 추구하면, 결국 일하는 자는 게을러지고, 게으른 자는 계속 게을러서 빈익빈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시스템이다.
얼마 전, 어떤 단체 행사에 참여했다. 4명이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각자 갈비탕, 육개장을 먹고 싶은 대로 주문했다. 모두 먹고, 힐끔힐끔 눈치를 본다. 누군가 식사비를 공동으로 계산하는 미덕을 보일까, 눈치를 본 것이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내가 낼께’는 ‘공산주의 사상’이다. 누군가 전체를 대신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시스템인 것이다.
내가 말했다.
“각자 먹은 것, 각자 냅시다. 저는 7천원입니다.”
내가 내 것을 내니, 모두 1만원을 꺼냈다. 4만원을 가지고 카운터에서 계산하고 나머지는 1천원짜리로 바꿔서 3천원씩 나눠줬다. 3명이 내게 말하길,
“투명하고, 정직하게 일을 잘하네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각자 먹은 것은 각자 계산하는 것, 탁월한 시스템이다.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누구도 기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자기가 먹은 식사비를 자기가 내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본질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도 자본권력의 문제점은 논외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