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민사상의 나르시즘에 빠지지 않으려면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얼마전, 마르크스 사상에 대해 취재를 하였다. 나는 충격에 빠졌다. 언론인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에 따라 시대를 해석하며 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였는데, 그것은 나르시즘이었다. “마르크스는 나쁜 악마”라고 이미 규정된 나의 인식관은 틀렸다.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고르바쵸프, 시진핑,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등 모든 인물이 공산주의와 연결되어 있으나, 서로 다른 차이가 존재하였고, 원본인 마르크스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로 극과 극의 대립을 보였다. 민주주의는 그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마르크스 사상을 악(惡)으로 규정하고 정당성을 얻었다면, 레닌이나 스탈린은 마르크스를 영웅으로 절대시하면서 권력의 명분을 얻었다. 인물과 사상은 같은데, 정반대로 보여지는 프리즘의 굴절현상이고, 나는 프리즘이 보여주는 현상에 취해 있었다.
“마르크스는 평생 난민으로 떠돌면서, 이방인으로 유럽을 배회하다가, 인류를 향한 인권과 평등과 자유를 수호하다가 그렇게 죽었어요. 사람을 사랑했던 한 인물이 철학적으로 고뇌하면서 쓴 것이 바로 마르크스 사상, 독일어로는 칼 맑스 철학이예요” (선미라 기호학 박사의 말)
내가 물었다.
“교과서에서 익히 배웠던 바로 그 공산주의 사상, 마르크스 말이죠. 나쁜 악마, 그 마르크스 말이죠. 그 사람이 정말로 그랬다구요?”
자식 3명이 난민으로 배회하다가 죽었고, 자신의 가정을 쳐다본 마르크스는 위대한 선언을 결단한다. “나의 가정은 이 사회의 비참한 실상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이후 사회구조 타파를 위해서 헌신한다.
축제가 끝나면, 결국 일상의 집에 돌아와 안식을 취한다. 무엇이 진실인가? 축제? 결코 아니다. 나의 현실이다. 집단의 몽상에서 나는 벗어남으로 현실을 개혁하고, 생활을 변화시키고, 지금 나의 모습을 직시한다. 결국, 내가 사는 집의 월세는 내가 내야하며, 핸드폰 요금도 내가 책임져야한다. 유대인의 선민사상에 취해 살았던 호세아에게 하나님은 고멜과 결혼하도록 중매를 섰다. 고멜이 바람을 피우고 달아나자, 그때 하나님은 이혼보다는 재결합을 종용했다. “가서 데려와 다시 살아보라”고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적 언어였다. 호세아의 가정이 바로 이스라엘 전체를 축소해서 나타났다.
나에 대해 이런 말, 저런 말, 많다. 세상에서 나를 극단적으로 추앙하는 말들도 있다. 나는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 술취함에 빠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절제한다. 나르시즘은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부끄러움을 모르게 한다. 인간은 결국 나약하며, 과거를 인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내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할 때, 나는 언제나 1999년 그때 사건을 경고등으로 켠다. 나의 태초, 그 초라했던 국민대 시절,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서 섭리의 선민사상에 취해 살았던 바로 그때, 한 사람을 만나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구원을 배웠다. 나는 결단코 그때를 잊을 수 없다.
내가 골방에서 하나님께 진실로 물었다.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고, 나는 이러하고,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과연, 이 기도가 하나님께 전달이 됩니까라고. 기도가 끝나고, 나는 홀로 앉아있는 나를 쳐다보면서, 기도는 독백에 불과함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놀랍게도, 다음날 나의 기도가 파랑새처럼 문자로 배달되었다. 하나님은 진실로 사람의 기도를 듣고, 그 소리의 내용을 판단하고, 합당할 때는 전달하심을 다시 확인하였다. 그리고, 나는 또 한번 1999년 나의 태초, 나의 지금, 나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지금을 보낸다.
1978년 007 가방을 들고 서울에 상경했을 정명석 목사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가끔, 그때 그의 입장을 홀로 생각해 본다. 더불어, 다메섹 도상에서 충격을 받고 눈이 멀었던 사도 바울의 심경도 생각해 본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부활의 예수님이 영적으로 바울을 찾아가 말에서 떨어뜨려서 눈을 멀게 했을까? 원수를 사랑함으로 원수에게 복음을 전파한 예수님의 그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 1517년 10월 31일 교황에게 제안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이고서 순식간에 반역자로 내몰렸던 루터의 입장도 가만히 생각해 본다. 진실을 수호하는 것이 얼마나 깊은 고뇌와 고통을 감당해야하는지…… 오늘도 나는 고뇌의 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루를 보낸다. 권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나르시즘의 늪에 침몰당하지 않기 위해서, 망각의 사탄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나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려고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