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오늘 갑자기 내 모습을 거울처럼 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인데, 내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어떤 사건인데, 그렇게 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는데…. 나는 그 사건과 연결된 사람에게 의견을 묻고 시간을 기다렸다. 체질이 변한 것이다. 산성에서 알칼리성으로 토질이 변하듯이,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변하듯이, 밀물에서 썰물로 물길이 달라지듯이, 단풍이 물들 듯이 내 성격이 변했음을 나는 알았다.
나는 별명이 본래 ‘독불장군’이다. 긍정적 측면으로 ‘신념과 확신의 강자’였고, 이면적으로 ‘왕고집, 고정관념의 대명사’였다. 옳은 것을 옳게 고집하면 그것이 신념이지만, 틀린 것을 틀리게 고집하면 인간폭탄이다. 독불장군(獨不將軍)은 혼자서 처리하는 군대 지도자를 일컫는데, 장수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군인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다. 지도자가 따르는 자들의 의견을 묻는 것, 그것이 지도자의 덕목인데,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 통보하면 그것은 독불장군 스타일이다.
몇해전, 나는 일방통행식 일처리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변화시켰을까? 어떤 회사 대표가 내게 홍보 책자 제작을 의뢰했다. 옛날에는 내가 쓴 기사이니, 그것을 그냥 보도하고 ‘수정불가 절대원칙’을 고수했다. 내가 자주 쓰는 말은 “머리는 잘라도 머리카락은 자르지 못한다는 선비의 지조처럼 내 손목을 잘라도 글은 손댈 수 없다. 내 펜을 꺽으려는 자는 그 손목이 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가 쓴 글에 대한 절대적 신념을 고수한 것인데, ‘고집불통의 감옥’에 갇힌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내 모습을 보니, 전혀 다르다. 내가 쓴 글이 혹시 틀렸거나, 상대 입장에서 수정할 것이 있는지, 당사자의 의견을 묻고 있으니, 과거의 내 모습과 현재의 내 모습이 분명히 다름을 알게 됐다.
얼마전에는 하나의 기사에 대해 카톡으로 20번 정도 수정을 해달라고 요청이 왔는데, 1시간 동안 그 기사를 수정했다. 내가 순순히 내게 부탁하는 분의 입장을 따라주고, 아주 사소한 단어의 변경까지 허락했다. 마지막 하나까지, 모든 것을 받아드렸다. 그때는 나의 달라진 모습을 몰랐는데, 내가 글을 쓰는 스타일을 오늘 곰곰이 관찰해 보니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뭐랄까? 거울에 비쳐보듯이 상대의 의견을 묻고서 최종 뚜껑을 덮는 그런 느낌이다.
드라마 100일의 낭군님(tvN)에서 원득 역을 맡은 도경수, 홍심 역을 맡은 남지현, 둘 사이의 사랑의 로멘스는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절대지존의 자리인 왕세자로서 도경수는 “느낌적 느낌이 불편하다”는 말로서 주변의 상황을 정리했다. 독불 왕세자였다. 그런데 홍심은 “너가 불편하니? 나도 불편하다”면서 불평을 늘어놓는 도경수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때부터 도경수는 상대의 입장을 돌아보면서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사회성을 갖게 된다. 완벽한 왕세자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아쓸남(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남자)로 전락해서 원득의 이름으로 살다가 홍심을 만나서 인격을 함양하는 스토리 전개에서 ‘왕의 절대 권력’이 갖고 있는 편협함을 풍자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인생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 땅에서 ‘왕의 권력’을 갖고 있으니, 개성의 왕으로서 백일의 낭군님이 보여주는 교훈을 묵상해보는 것도 유익할 것 같다.
나와 의견이 다를 때, 내가 듣기 싫은 지적을 누군가 던질 때, 내 마음이 몹시 불편할 때, 가끔 상대도 그러함을 인식하는 배려의 문화가 이 사회에 골고루 퍼지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