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장창훈]=순찰자, 관찰자, 암행어사의 꿈을 계시로 받은 느브갓네살 황제는 결국 다니엘의 해석대로 그렇게 되었다. 다니엘은 순찰자였다. 또한, 큰 나무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이 관찰의 관찰이다. 다니엘에게 느브갓네살 황제의 꿈을 듣게 하신 하나님의 의향은 무엇일까? 다니엘도 느브갓네살의 위치에 해당됨을 훗날 깊은 기도로 깨닫는다.
절대적 구원의 특권층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을 한 것이 바로 나무의 꺽임이요, 다니엘이 그루터기의 한 부분이 되어서 새로운 부활을 소망하는 위치에 처한 것이다. 느브갓네살은 7년후 재집권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210년만에 고향으로 귀환한다. 그때부터 유대교라는 종교가 본격적으로 태동한다. 이집트 고역 400년, 바벨론 포로 210년의 긴 세월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를 향한 진실한 신앙심이 들어간 것이다.
삶속에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관찰의 관찰이다. 이것은 사회적 전문용어로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 자주 사용했다. A가 어떤 사건을 목격했다. 그때 A를 B가 보고 있다. 이런 상황은 생활속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설교를 하고서, 성도들에게 반응을 묻는 것이 바로 관찰의 관찰이다. 권력은 한자로 공평한 저울추를 뜻한다. 반면, 현실적으로 강한 힘을 의미한다. 권력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 권력을 움켜쥘 새로운 힘이 존재함을 또한 알아야한다. 이것이 상호견제이다. 왕과 신하와 백성은 권력을 서로 움직이는 상호 관찰자이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가장 큰 이유는 자화자찬을 통한 비판과 견제의 상실이다. 모든 권력은 상대적 견제가 사라지면 기울게 된다. 권력은 사람처럼 좌우대칭일 때 가장 안전하다. 홀로 존재하면 권력은 날카로워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다. 관찰의 관찰 이론은 항상 거울을 보듯이 자신의 행함을 돌아보고, 사람들에게 묻고 경청하는 것이다. 다니엘은 스스로 겸비하여 그렇게 살아갔다.
다니엘이 신상에 절을 하지 않으니, 매일 하나님께 경배하니, 바벨론 족속이 볼 때는 다니엘의 행동이 우상숭배였다. 신을 믿는 신앙인은 누구나 자신이 믿는 신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를 우상으로 본다. 절대적으로 섬기는 대상은 오직 하나다. 그래서 다니엘도 사자굴에 던져졌다. 느브갓네살 황제의 꿈이 적용된 것이고, 이스라엘 민족이 실상 바벨론의 사자에게 던져졌다. 짐승같은 이방민족 가운데 생존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밖에 없다.
경찰과 검찰이 기소권 다툼을 한다. 둘의 관계는 죄를 조사하는 기관인데, 만약 경찰에 기소권이 넘어가면 기소권 남발은 불보듯 뻔하다. 대신 국가권력을 유지함에 있어 장점이 있다. 경찰이 검찰을 견제하는 것이다. 경찰에 기소권이 허락되면, 경찰이 검찰을 기소할 수 있다. 이것이 관찰의 관찰이다.
요즘 법원이 벌집이다. 권력의 삼각형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한 법원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결정하면서 행정부를 견제하는 권력의 정점에 섰다. 판사의 판결은 3심재로 견제될 뿐 외부에서 통제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 판사는 가장 안정적인 권력기관이다. 관찰의 관찰이 적용되지 않는 곳이 바로 법원이다. 행정부를 꺽은 사법부도 이제는 탄핵과 조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이 세상은 절대적 가치가 부존재함을 인정하고, 스스로 낮아져 자신을 돌아보는 겸허의 자세가필요한 때이다.
누가 보랴!! 이런 생각이 자신을 망친다. 중용에서도 아무도 없는 곳, 스스로에게 부끄럼없이 사는 것, 그것을 독신이라고 했다. 홀로 독. 삼갈 신. 밀실에서 단 둘이 행하면 아무도 모를 것으로 생각하겠으나,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의 양심이 이미 알고, 하나님이 알므로 그 밀실의 커텐이 걷힘으로 비밀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관찰의 관찰이다. 모든 순찰자, 모든 관찰자는 곧 자기자신이다. 양심의 눈이 자신을 감찰하도록 창조주는 인생을 설계했으니,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