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진시황제, 시진핑과 같은 절대 권력자 느브갓네살 황제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냈고, 아들이 권력을 물려받았다. 2세는 경험이 미흡하다. 느브갓네살 황제는 하나님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면서 성전의 각종 기명을 함께 가지고 갔는데, 그것을 보물창고에 그대로 뒀다. 벨사살 왕은 그 기명을 꺼내서 활용했다. 술파티를 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벨사살 왕은 한국의 역사로 비유하면 연산군과 흡사하다. 흥청망청 술을 마시다가 폐위된 그런 권력자였다. 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으로 이어지는 권력구도는 중종반정으로 세조의 단종 찬탈이 종지부를 찍게 된다. 연산군은 잔치와 향락을 즐겼다. 잔치를 하고, 향락을 일삼으면 모두 ‘빚잔치’다. 파티가 끝나면 누군가 설거지를 해야하고, 누군가 뒷감당을 해야하며, 파티가 계속 이어지면 술값과 파티비용을 누군가 부담해야한다. 그렇게 망한 국가가 그리스다. 그리스는 퍼주기식 복지를 하다가 부채국가로 전락했다. 국가 신용도가 하락하는 것은 무상복지를 무한대로 늘릴 때 그렇게 된다. 가계빚도 버는 것이 없으면서 계속 쓰게 되면 결국 부도가 난다. 벨사살 왕이 그러한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벨사살 왕의 행함이 위험수위를 넘어선 것이다. 결정적 사건은 성전기명을 꺼내서 술을 마시는데 쓴 것이다. 술이 한잔 들어가니 정신이 흐리멍텅해지면서 기분이 몽롱해진 상태에 빠졌을 것이다. 그때 벨사살 왕이 비몽사몽간에 어떤 손가락을 목격한다. 그 손가락이 벽에 뭔가를 적었는데, 또렷하게 새겨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때는 정녕코 이런 신비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나타난 현상은 벽에 좀벌레나 어떤 벌레들이 글씨를 쓴 것인데, 그 벌레를 움직이는 실체가 ‘손가락’인 것이다. 벨사살은 그 손가락을 직접 보았으니, 벌레가 쓴 글자가 아니라, 어떤 손가락이 쓴 글자이며, 이것은 ‘뜻과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것이다. 인생도 살아가면서 정말로 신비한 일들이 일어난다. 되어진 일들은 모두 하나의 글이요, 문자다. 그것을 능히 해석하려면, 손가락의 주인에게 물어봐야한다. 글자는 손가락이 쓰고, 손가락은 뇌가 움직인다. 글을 쓴 자에게 글의 뜻을 묻는 것이 상식이다. 벨사살 왕이 볼 때 벽에 써진 어떤 글자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으니, 모든 박사를 부르고, 모든 지식인을 불렀으나 그 의미를 속시원히 말해줄 자가 없었다. 그때 왕비가 조언하길, “다니엘을 부르소서”라고 한다.
인생이 번민하는 근본 이유는 전문가를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 집안에 세탁기가 고장나면 AS를 부른다. 정수기가 고장나도 AS를 부른다. 그 전문가를 찾는 것이다. 그와 같이 매사 모든 일에는 그 전문가를 만나야 문제가 해결된다. 요시야는 갈그미스라는 문제가 있었고, 국방문제를 해결하려고 날마다 기도를 했었다. 그때 하나님은 느고왕을 보내서 새로운 오리엔트 연합을 만들려고 했었다. 신흥제국 바벨론은 우상국가여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이집트와 앗수르를 연합해서 바벨론을 대항하는 연맹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요시야 입장에서는 갈그미르를 없애는 절호의 기회였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정치체계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시야는 자신이 국방력을 키워서 갈그미스를 없애려고 했고, 느고왕과 외교마찰을 일으키면서 쇄국정책을 펼쳤다. 하나님의 뜻이 아무리 원대해도 사람이 제대로 못하면 성취되지 못한다. 이것이 무지속의 상극세계다. 전문적인 일에는 반드시 전문가를 써야 문제가 해결된다. 영어통역에는 통역사를 써야 해결되지, 자신과 친한 사람을 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을 부르소서’는 인생이 살면서 그 사건에 합당한 적임자를 찾는데 매우 중요한 명언이다. 다니엘을 불러야 해결된다. 성경은 기록하길, 다니엘에게는 거룩한 하나님의 신들이 함께 하고 있다고 했다. 벽에 쓴 손가락의 주인은 곧 하나님이요, 다니엘은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이니, 능히 그 뜻을 알았던 것이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문제를 해결할 적임자, 다니엘을 부르라는 신호와 같다.
의문부호? 벽에 쓴 글, 결국 그것은 벨사살 왕의 행함을 적은 성적표였다. 다니엘은 평생 그것만 연구했으니, 벨사살 왕이 든 성전기명을 보았을 것이며, 벽에 쓴 글자도 히브리어이거나 혹은 다니엘만 아는 어떤 언어였을 것이다. 다니엘이 말하길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고 해석했다. 이 문장은 인생이 살면서 반드시 기억해야한다. 자신의 행함이 곧 저울에 달아지는 것이다. 벨사살이 한 그 향락이 저울에 달아져서 결국 자신이 망하게 한 것이다. 향락의 끝이 패망인줄 알았더라면 벨사살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전 기명을 술잔으로 쓴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분노할 사건인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전기명을 술잔으로 쓰듯, 전문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 성전기명은 성전기명으로 써야한다. 술잔은 술잔으로 써야한다. 소송은 변호사에게 맡기고, 질병은 의사에게 맡겨야한다. 소송을 의사에게, 질병을 변호사에게 맡기는 것은 성전기명을 술잔으로 쓰는 것과 같다. 각각 용도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반드시 해야하고, 각각의 개성대로 왕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순리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다. 인재를 제대로 등용하면 국가는 부국강병을 이루고 조직은 확장되며 기업은 견실해진다. 반면, 인재를 제대로 쓰지 못하면 되던 일도 안되고, 조직은 축소되고, 사람들이 떠난다. 친한 사람을 기용하는 것은 쓰기에 편할 뿐, 조직운영과는 별개의 문제다. 자신과 친한 사람을 전문영역에 맡기면 그것은 성전기명을 술잔으로 쓰는 형국과 같다. 자신과 친한 사람을 쓰는 것은 사람의 심리이고, 그렇게 사람을 쓰더라도 반드시 전문영역을 고려해서 일을 맡겨야한다. 그래야 조직이 제대로 굴러간다.
인재를 제대로 쓰지 못하면, 그 사건이 결국 저울에 달아서 부족함이 생기며, 나라가 쪼개지듯이 단체는 분열된다. 벨사살 왕은 결국 대국이 분열되었고, 왕권을 뺏기게 된다. 그와 같이 조직도 인재를 제대로 써야만 조직이 계속 성장한다.
권력자는 신하를 마음대로 부릴 권한이 있다. ‘임의로 할 권세’가 있다. 그러한 권세를 가지고 성전기명을 술잔으로 쓰듯이 마음대로 하면 벨사살 왕이 될 수 있다.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하면 절대로 안된다. 상대의 의향을 물어보고서 해야한다. 상대는 원하지 않는데 왕이 무조건 시켜서 하면 결국 그러한 조직은 소통이 사라지게 된다. 성전기명을 술잔으로 쓴 사건, 술잔을 성전기명으로 쓰는 것, 모두 그러하다. 사람의 의향과 전문성을 고려해서 인재를 제대로 활용해야하고, 특히 다니엘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은 특별히 대우해야한다.
벨사살 왕은 다니엘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였다. 마치 성전기명을 술잔으로 쓰듯이 다니엘을 좌천시켰던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인물인데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권력자는 따르는 자들이 누구인지, 그 사람속에 어떤 신이 함께 하는지 세밀히 파악하고 제대로 대해야한다. 자신보다 낮은 사람이라도, 그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다니엘처럼 왕을 저울에 다는 판결자가 될 수도 있다. 곧, 다니엘이 저울추가 되어서 벨사살 왕의 행위에 마침표를 찍고, 왕위를 폐한 것이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쓰고서 그렇게 한 것이다. 보이는 권력자로서 왕의 말이 힘이 있듯이, 영적인 권력자는 그 말이 힘을 발휘한다. 하나님의 신이 다니엘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