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다니엘서 6장까지 다니엘은 해결사였다. 반면 다니엘서 7장부터 다니엘은 문제를 푸는 학생이요, 미적분을 풀다가 미로에 빠진 수험생이다. 난제(難題)는 곧 꿈으로 왔다. 왕의 꿈을 풀고, 각종 난제를 해결하면서 사자까지 물리친 다니엘도 하나님이 보여주신 기이한 환상앞에 입을 다물었다. 마치 공포영화를 보는 듯한 4마리 짐승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알았다. 그 환상이 미래에 되어질 일이라는 것을, 그것은 다니엘과 하나님이 맺은 상징의 암호였으니…..
다니엘의 꿈은 해피엔딩이다. 드라마의 극한 반전으로 역전이 일어난다. 그것이 다니엘서 7장 13절이다. 인자 같은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에 다른 이견(異見)은 있을 수 없다. 다니엘의 예언은 이미 성취되었고, 그리스도가 탄생하기까지 지중해 근방의 미래 정치를 예언한 것이다. 결국, 로마가 모든 권력을 넘겨받았으므로, 마지막 짐승은 로마를 말하는 것이리라. 되어진 것으로 꿈을 푼 것이다. 로마에 교황청이 들어섰으므로, 또한 인자같은 이가 그 나라를 이어받은 것이다. 꿈의 해몽은 되어진 일로 푼다.
모든 일이 끝나면, 꿈은 명확해진다. 꿈이 상징으로 나타나서 그렇다. 꿈은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한다. 꿈속에 짐승이 보이는 것은 짐승처럼 살아가는 냉혹함을 말하는 것이다. 고대 지중해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아시아도 춘추전국시대를 비롯해 진시황제의 통치는 정말로 섬뜻했다. 왕권통치 자체가 그럴 수 밖에 없었고, 철기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탐욕은 상대를 죽여서 뺏아기위해 살인을 정당화했다. 그런 모든 시대가 끝나고, 예수님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인자(人子)로 이 땅에 태어난 예수님이 새로운 나라를 선포해서 로마문화를 새롭게 변혁해서, 로마의 여론을 장악하고, 정치권까지 그리스도의 물결이 넘치게 하기까지 3C가 걸렸다. 예수님이 만약 십자가 사건을 겪지 않았다면 장수(長壽)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의 권력과 문화를 쉽게 바꾸지는 못했을 것이다. 단지,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는 참혹함이 사라지고, 보다 빠르게 유대교를 중심으로 로마의 새로운 문화운동을 일으켜서 짐승같은 인본주의를 타파했을 것이다.
다니엘은 꿈을 받았고, 그 꿈은 실제로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 사람이 강물처럼 흘렀고, 피눈물의 사연으로 살다간 인생이 있다. 순교자들이 피가 강물이 되어서 로마는 서서히 정화되었다. 지금의 로마 교황청이 이탈리아에 있게 된 것은 순교의 피가 있어서이지, 천주교의 정치적 힘이 강해서가 아니다. 짐승같은 세상속에서 신본주의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니엘서 7장 13절처럼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인자같은 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과 믿음과 섬김으로 가능할 것이다.
역사는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로마제국이 나타나기까지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그처럼, 인류문명은 2천년동안 기독교를 중심으로 평화의 역사가 일어났으나, 기독교 안에서도 종교전쟁이 있었고, 기독교 밖에서도 수많은 종교전쟁과 이념전쟁이 발생했다. 가장 극적인 전쟁은 바로 세계대전이다.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을 중심으로, 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까지 동참하는 지구전쟁으로, 3차 세계대전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극한 대립인 냉전으로 전세계를 뒤덮었다.
그렇게, 전쟁이 눈보라처럼 인류문명을 휩쓸었어도 인류문명의 심장이 멈추지 않은 것은 오직 하나, ‘인자같은 이’가 있어서이다. 그것이 아니면, 공산주의의 그 무서운 권력의 짐승, 자본주의의 그 매혹적인 돈의 짐승을 누가 이길 수 있으랴. 인간이 만든 제도는 곧 짐승이요, 오직 신본주의로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만이 이 땅에서 온전히 살아가게 한다.
다니엘처럼 믿는 자가 번민에 빠지는 이유는 해결할 수 없는 난제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구를 공중분해한다고 모든 악(惡)이 사라지겠는가? 모든 인생의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악(惡)이 있으니, 세상 제도를 탓할 것도 아니다. 스스로 마음을 겸비하면서, 자신의 방은 자신이 청소하듯이 각자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것, 더불어 다니엘서 7장 13절처럼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감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