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종교탐방 / 장창훈]=‘현대판 사도바울’로 명명되는 이정훈 교수, 진보에 속했다가 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이켜 새로운 신앙길을 걷는 그의 삶, 유튜브 영상으로 만나봤다. 내게는 큰 울림이 없었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사도바울의 이미지로 생각했던 인식관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어법이 진중하지 못한 이정훈 교수의 표현법이 마음의 벽을 차단했다. 한국문화는 존칭법이 ‘맛’을 좌우한다. 예수님이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듯이, 표현법에서 존칭법은 ‘소금’의 역할이다. 이정훈 교수님의 강연이 갖는 결함중 하나다. (내가 볼 때 그렇다.) 묵직한 주제다. 루터가 절대권력 교황을 대항하듯, 캘빈이 그러하듯, 이정훈 교수도 지금의 권력을 향해 신념의 칼을 들고서 싸우는 것이다. 마치 투사처럼. 그렇다고 정치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잠자는 종교인의 의식을 깨우는 일이라서 종교안에서도 사상이 다른 반대편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개영상과 대중강연은 더욱 깊이기 필요할 것이다.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비판하는 대목은 너무 천박했다. 전체적으로 탁월한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음에도 중간중간 불필요한 주제로 특정종교를 자신의 잣대로 세상의 단어를 사용해서 비판한다면, 그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해석하는 오류에 봉착한다. 자신이 다루는 주제, 더불어 자신이 상징하는 위치에 비해서 덜 숙성된 강연이다. 아무래도 사도바울로 사람들에게 불릴 수는 있어도, 성경속 사도바울의 길을 가려면 아라비아로 떠나는 스스로의 성찰과 깊은 고뇌가 더 필요할 것이다. 바울은 16년의 긴 세월속에 배척과 버림과 왕따와 따돌림을 견딤으로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살아냈다. 포도주로 비유하면 창고에서 16년동안 숙성한 것이다. 그리고 바나바가 그 어느날 바울을 찾았다. 16년만에, 예수님께 돌이킨 16년만이다. 그동안 바울의 지식은 포도주처럼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고백으로 숙성되었고, 이후 엄청난 전도역사가 일어난다. 때가 극박하므로 이정훈 교수가 외쳐야할 사명이 있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조언을 통해서 그 강연을 보았는데, 아쉬운 측면이 많다. 천주교를 비판하는 대목은 이정훈 교수의 종교관이 편협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니 그렇게 이해하기로 한다. 고해성사를 다루는 부분이 성경적으로 옳다는 의미는 아니다. 특정 종교에서 신념으로 삼고 있는 중요한 제도를 세상의 천박한 단어를 사용해서 교회단상을 통해 비판하고, 그것을 풍자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천박한 강연의 단면인지 스스로 인지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강연의 품격이 확실히 달라질 것이다.
이정훈 교수의 강연을 통해 ‘자유의 본질’을 확실히 배우고, 알게 됐다. 그의 견해는 날카롭고, 청소년들에게 신본주의와 종교적 깊이를 설명해주는 소중한 내용임에 틀림없다. 자유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법치국가가 얼마나 소중한지, 왕권주의와 법치국가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 그 뿌리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법을 주시고, 그 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곧 자유라는 것, 제도적 틀이 캘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역사와 종교를 해석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새로운 의식과 신념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 이정훈 교수는 강연보다는 글을 통해서 만나는 것을 우선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