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은 말라기에서 끝나고, 지금도 누군가를 기다린다. 반면, 기독교는 마태복음이 새롭게 시작한다. 말라기에서 마태복음 사이는 대략 400년이다. 느헤미아를 통해서 성전건축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에스라와 학개를 통해서 성도들의 예배형식이 갖춰졌지만, 부흥집회는 1C를 넘지 못했다. 그때 말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선지자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400년 동안에도 다니엘 선지자를 통한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세상의 왕으로는 페르시아-메데-헬라-로마 제국이 차례로 변경될 때마다 하나님적 심판을 감행하셨고, 유대민족도 마카비-하스몬-헤롯 왕조로 이어지면서 성도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유지시켰다. 그때 등장한 신앙의 학풍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에세나파이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에세네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단 종교에서는 말라기~신약까지 영적인 어둠의 시대라고 판단한다. 영적 무지는 곧 영적인 어둠의 시대가 되게 한다. 그래서 역사를 배워야하고, 영적인 역사도 배워야하고, 역사의 근본인 하나님께 기도해야한다. 성령의 빛이 내면에 임하지 않는다면, 결코 어둠을 이길 수 없다. 성령의 스위치를 켜야만, 우상숭배를 거절할 수 있다. 우상숭배가 뭔지 알아야, 우상숭배를 하지 않게 된다. ‘우상’이 뭔지 모르니까, 우상숭배를 하면서도 ‘하나님 경배’로 착각한다. 죄가 뭔지 모르면 죄를 지으면서도 ‘의’(義)로 착각하듯 그렇다.
구약을 압축하면 “하나님 경배”다. 이것이 십계명 1조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가 가장 중요한 신앙철학이다. 다윗 왕은 ‘다른 신’에 해당될까? 해당된다. 만약, 하나님보다 다윗왕을 추종하면, 그것이 ‘다른 신’이며, 우상숭배다.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신앙인의 분별력인데, 쉽지 않다. 다윗왕이 밧세바를 취했다. 유부녀 겁탈사건으로, 미투운동의 범죄를 저질렀다. 아주 평화로운 오후, 부하 장수는 변방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하고 있는데, 충성자의 부인을 불러서 상담하다고 잠을 잔 것이다. 왕도 충분히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실수를 덮기 위해서 살인하는 것은 왕이라도 용서받을 수 없다. 남자가 여자를 취하는 것보다,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 살인하는 것은 더 악랄하고, 비열한 짓이다. 우리야를 불러서 임신 스캔들을 덮으려고 했으나, 왕의 뜻대로 되지 않으니, 전쟁을 이용해서 우리야를 죽이는 중범죄를 저질렀다.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입이 되어서 다윗에게 직언했다. 만약,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충고를 듣지 않고서, “나단을 처형하라”고 했다면, 나단은 처형되고, 다윗의 왕조는 붕괴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은 우리야를 통해서 1차 경고하고, 나단을 통해서 2차 경고를 한 것이다. 다윗은 나단의 경고를 받아드리고,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면서 새롭게 자복한다. 잘못은 다윗처럼 회개해야한다.
간통과 살인에 대한 형벌은 가혹했다. 압살롬이 일어나서 다윗의 궁녀를 대낮에 겁탈하는 것으로 댓가를 치뤘다. 이러한 정황을 보더라도, 종교의 왕도 하나님과 대적자가 된다.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짐승 4마리가 세상의 정치권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왕권독립을 추구했던 헤롯왕조차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지 않던가.
아담이 실패한 것은 하나님보다 아내의 말을 따라서 그렇다.
예수님이 성공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렇다.
인생의 운명을 결정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택해야한다. 누구의 말도 절대기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서 사람을 분별해야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은 늪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다니엘서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 보이는 권력은 짐승이요, 오직 하나님을 절대로 사랑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오늘 나는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하나님이 아니면 암흑이요, 하나님을 중심하면, 빛에 속한다. 짐승은 “나를 섬기라”이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라”이며, “상대를 섬기라”이다. 나를 섬기는 짐승의 권력은 전쟁이요, 하나님과 상대를 섬기는 인자의 권력은 평화와 사랑이다. 복음서를 깊게 읽어보면, 권력의 속성은 2가지로 구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