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한국어에는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가 있다. 음값이 같은데 뜻이 완전히 다른 말이다. 밤(夜)과 밤(栗)이 대표적이고, 눈(目)과 눈(雪)도 그렇다. 성경을 읽을 때 동음이의어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고, 다른 뜻으로 이해할 경우 엉뚱한 의미로 풀이된다. 그것이 만약 구원과 관계된다면, 천국인줄 알았는데 지옥일 수 있고, 생명인줄 알았는데 사망일 수 있다. 예수님은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것을 놓고, 오직 예수님 혼자만 “생명과 영광의 십자가”라고 판단했다. 제자들도, 제사장들도, 모두 저주의 십자가로 생각했다. 향유옥합을 뿌린 마리아는 십자가 사건의 깊은 뜻을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렇게 했었다. 모두 틀렸다고 했는데, 그것이 정답이었다. 이처럼, 성경의 깊은 비밀은 하나님과 성령님께 물어야만 정답을 알 수 있다. 헤깔릴 때가 정말로 많다. 이집트가 갈그미스를 없애겠다고 갑자기 침공했을 때,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로마 티토 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초토화시켰을 때, 대학교수인 루터가 교황의 정책을 맹비난했을 때, 과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으로 분별할 수 있는가? 오직 ‘말씀’이다. 성경말씀이 곧 답을 찾는 방향이요, 나침반이요, 안내자요, 새벽별이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새벽별”로 소개했다. 새벽별은 모든 어둠속에서 가장 빛나는 별로서 방향의 기준점이다. 곧 말씀이 새벽별인 것이다.
[계시록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使者)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계시록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獅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계시록 22장의 사자(使者)는 영어로 ‘angel’로 번역되고, 계시록 5장의 사자(獅子)는 lion으로 번역된다. 하나는 심부름꾼의 대리인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의 그 사자다. 다윗은 유대지파의 왕이었고, 용맹함이 곧 사자와 같았다. 사자도 맨 손으로 때려잡았으니, 과연 사자같은 별칭이 합당하다.
‘유대 지파의 사자’가 ‘다윗’을 꾸며주므로, 다윗이 사자와 같다로 해석되지만, 영어로 확인하면 “the Lion of the tribe of Judah, the Root of David”이다. 곧 예수님이 ‘사자(獅子)’의 별호임을 말하고 있다. 한문성경을 보더라도 “猶大支派中的獅子、大衛的根、他已得勝”라고 되어있다.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동격이다. 곧 예수님이 유대지파의 사자인 것이다.
사자처럼 용맹하신 예수님이 어린 양이 되셨다. 이것이 진실한 사랑이다. 그 누가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왕이신 예수님이 종이 되셨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다. 인류문명 가운데 누가 생명으로 죄값을 감당할 수 있는가? 모두 사자같은 권력을 가지고 양을 잡아먹기 급급했다. 오직 예수님만 종교와 지식과 영성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서 어린양처럼 순수하게 살아가셨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삶의 견본노정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요청한 ‘사자로서 양의 삶’이다. 종교 권력을 가진 종교 지도자는 이미 사자(獅子)와 같은 왕이다. 왕된 사자로서 양을 잡아먹을 것인가? 어린 양이 될 것인가? 각자에게 맡겨진 선택의 몫이리라. 각자 행위가 답이 되어, 정답과 오답의 운명을 결정하리라.
[계시록 2:12]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