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중략)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중략)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나는 개인적으로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사람과 성적 지체로 해석하는 것을 찬성하고, 동의한다. 지금도 그러하다. 향락주의, 동성애를 막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처방은 ‘창세기 타락론’밖에 없다. 창세기 2장의 비유를 ‘이성문제’로 해석할 경우, 청소년의 성범죄도 막을 수 있고, 공부해야할 사춘기 때 신앙에 집중하게 할 수도 있다. 창세기의 타락사건을 ‘이성범죄’로 해석하는 곳은 통일교와 몇몇 종교단체가 있다. 이곳은 성적 순결운동이 매우 강하다. 교리가 절대적이라서 그렇다. “따먹으면 죽는다”는 것은 세상의 은어로도 이미 있고, 청소년에게 강력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청소년 이성범죄를 막는 예방주사로서 ‘이보다 좋은 성경해석법’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한다.
그러나, 성경의 본질로 가보자. 창세기에 있는 에덴동산 현장에 가보자. 우리는 에덴동산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히는 에덴지역에 있는 00동산이다. 에덴지역은 마치 장안동과 같고, 동산은 00건물과 같다. 그 당시는 신석기 시대였으니, 밭농사와 목축이 시작됐다. 나의 동생이 고흥에서 ‘임마누엘’ 농장을 한다. 그러한 농장을 아담에게 줬던 것이다. 고흥 동강지역의 임마누엘 농장처럼, 에덴지역의 00동산이다. 여하튼, 에덴동산은 에덴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창세기의 그 동산’이니, 에덴동산이라고 하자.
‘따먹었다’ ‘선악과’ ‘임신’ ‘무화과잎’ ‘벌거벗다’ ‘동산중앙’ 등을 종합하면, 사람의 은밀한 그곳을 비유한다. 엑스제시스적 성경해석법처럼 보여진다. 엑스제시스적 성경해석법이 되려면, 본문에 충실해야한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생각되는 인식이 아니라, 창세기의 본문에 충실한 성경해석이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이 왜곡되지 않고, 엑스제시스가 된다. 본문을 벗어나면, 그것은 구약 창세기의 DNA가 아니다.
본문으로 돌아가보자.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하와에게도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다. 생명나무 이야기는 전혀 없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했다. 뱀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 ‘선악과’로 유혹했고, 그 선악과를 아담에게 줬다고 했다. ‘이성관계로서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백보 양보해도, 하나님이 ‘선악과 서리’ 사건을 놓고 심히 걱정하면서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말했다. 생명나무가 그 생명나무라면, 대략난감이다. 생명나무가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악나무와 생명나무’가 별도로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선악과 서리 사건은 종합하면 이렇다.
1. 선악과 따먹지 말라.
2.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
3. 아담도 선악과를 따먹었다.
4. 생명나무 열매는 따먹지 못했다.
5. 생명나무 열매를 지키려고 아담과 하와를 추방했다.
6. 화염검의 철조망을 쳐서 생명나무 길을 지켰다.
[창세기 3: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생명나무의 길’은 에덴 동산에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생명나무는 곧 영생과 관련된다. 하나님은 “그것을 따먹으면 영생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합리적 의심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무턱대고 이성관계로만 집착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식 해석인 것이다. “선악과 사건을 이성관계로만 해석하는” 부류는 나의 주장에 대해 “모세가 성경을 잘못 썼다”라고 말한다.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고, 잘못된 주장인가? 시험지를 푸는 학생이 “시험문제가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답이 정답이 되게 하려고, 시험문제가 틀렸다면서 시험문제까지 정정한다면, 그것은 억지다. 창세기의 본문 텍스트는 하나님이 설정한 ‘성문법’이다. 원문내용은 본질에서 변경될 수 없다. 생명나무 실과는 따먹지 못했고, 그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보존된 것이 창세기의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성적 타락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아이스제시스적 해석의 한계가 여기서 드러난다.
–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