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타락론
타락(墮落)은 무엇인가? 추락(墜落)은 무엇인가? 급락(急落)은 무엇인가? 몰락(沒落)과 탈락(脫落)은 무엇인가? 낙엽(落葉)은 떨어진 잎새다. 본래 붙었던 가지에서 떨어지면, 그것이 낙옆이다. 落은 곧 기준에서 멀어짐이다. 타락을 알려면, 본래 기준이 무엇인지 알아야한다. 다시 쓰는 타락론은 창세기 선악과 사건을 말한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추출(抽出) 다른 하나는 주입(注入)이다. 추출은 본래 있던 것에서 나오는 것이고, 주입은 외부에서 넣는 것이다. 생명의 잉태는 추출이지, 주입은 아니다. 본래 있던 염색체가 감수분열을 통해서 생명체가 탄생하는 과정은 추출이다. 유전자 검사를 했는데, 친자관계가 아닐 경우 낭패다. 이것이 추출의 핵심이다. 자식의 유전자가 부모로부터 왔듯이, 신약은 구약에서 왔다. 이것이 성경해석의 근본이며, 기본이다. 히브리어로는 ‘엑스제시스’(exegesis)라고 한다. 반대말은 아이스제시스(eisegesis)이다. 엑스제시스는 본문에 충실한 해석법이고, 아이스제시스는 독자중심 해석법이다. 아이스제시스는 사족을 말하고, 엑스제시스는 본문을 뜻을 그대로 반영된 해석법을 의미한다. (아이스=안으로, 엑스=밖으로)
내가 만약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근거로 어떤 성전건축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하자. 이것을 ‘아이스제시스’라고 한다. 루터의 특별한 사건을 가지고, 다른 것을 비판하는 것, 그것이 아이스제시스이다. 루터의 개혁사상은 참고사항이다. 루터의 사건은 루터로서 분석해야한다. 내가 마약왕(파브로) 영화를 봤다. 파브로가 자수를 하고서, 감옥을 왕국으로 만들어서 축구하는 모습이 있었다. 그 장면만을 끄집어내서, 내가 만약 어떤 사건을 맹비난했다고 하자. 그것을 일컬어 ‘아이스제시스’ 해석법이라고 한다. 축구하는 모습만을 가지고서 특정한 인물로 빗대어서 풍자하는 것, 그것이 자기식 해석법이다. 매우 위험하다. 엑스제시스는 마약왕은 마약왕 안에서 해석하고, 그것을 교훈으로 삼는 것이다.
유대인은 왜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을까? 엑스제시스 해석법 때문에 그렇다. 구약정경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기독교는 신약 성경을 새롭게 만들었다. 신약은 참고서가 아니고, 같은 교과서이고, 구약의 개정판을 넘어서 ‘필수과목’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신약은 구약과 다른 아이스제시스인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설정에서 ‘엑스제시스’인지, ‘아이스제시스’인지 구분되는 것이다. 신약의 DNA와 구약의 DNA를 유전자 검사를 해보면, 친자관계가 성립한다. 그래서 신약이 구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은 다르지만 같다. 동질성이다. 반면, 코란은 구약에서 말미암지 않았다. 전혀 다르다. 코란은 아이스제시스이고, 몰몬경과 원리강론도 아이스제시스이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님과 사도바울을 극도로 추종하는 이단(마르시온파의 극단적 이원론)이 등장했다. 기독교 중에서 극열한 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은 주장하길,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은 전혀 다르다”라고 설명했다. 들어보면 그럴 듯 하다. 그러나 이단이다. 그 이단이 정말로 잘되었고, 신도수도 급격히 늘었다. 결국 망했다. 구약에서 신약이 왔음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것과 같다. 구약이 없다면 신약도 없다. 구약의 핵심 DNA는 하나님이다. 신약의 핵심 DNA는 주 예수다. 둘의 관계는 ‘말씀의 부자관계’이다.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셨다면,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면, 구약이 예언한 그 축복을 받을 수가 없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그렇게 핍박했지만, 저주의 십자가로 죽였지만, 끝까지 율법을 통해서 말씀을 완성했다. 구약의 하나님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이 엑세게사토이며, 엑스제시스이다. 예수님은 구약으로 말미암았다.
이단이 많다. 그중에 진짜가 있을 수도 있다. 조개속에 진주가 있듯이, 하나님과 주 예수는 이단종교에 자주 가실 것이다. 교실에서 우등생과 열등생을 모두 사랑하는 참교사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은 이단을 포함해서 우상종교까지도 감찰하고, 그 양심을 돌아보실 것이다.
누군가 새롭게 온다면, 반드시 신약을 통해서 와야한다. 신약을 무시하고, 직접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은 ‘아이스제시스’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과 자신을 ‘부자관계’로 설정했다. 구약과 연결된 관계성이다. 새롭게 누군가 온다면, 반드시 구약과 신약을 인정하는 ‘누군가’여야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관계성인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을 인정했다. 인정했다는 것은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시지 않았다. 그처럼 이 시대에 누군가 온다면, 신약의 예수님과 관계성을 맺어야한다. 그 관계성이 사랑의 관계이든, 믿음으로 형제관계이든, 배움으로 사제관계이든, 말씀으로 일체관계이든, 그 무엇이든 예수님과 맺은 관계에서 새로운 역사가 출발한다. 이것이 아니면 모두 아이스제시스이다. 즉, 사족(蛇足)이다. 나의 칼럼이 성경보다 더 큰 영감을 주더라도, 만약 구약과 신약의 본질과 다르다면, 주 예수를 부정하는 내용이라면, 내 말은 틀린 것이다. 결코, 따라서는 안된다. 글쟁이로서 지나친 의욕이 앞서서 그럴 수도 있으니,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분별해야한다. 기준은 말씀이며, ‘말씀’은 성경말씀을 의미한다. (엑스제시스는 ‘성경이 성경을 푼다’는 것과 같다. 성경안에서 모든 것을 해석해야하고, 절대로 주 예수를 부정하면 안된다. 주 예수는 AD 0년이며, 역사의 기준점이고, 하늘과 땅의 유일한 기준점이다.)
원리강론이나 각종 이단들이 “내가 재림주”라고 할 때, 확인할 것이 있다. 주 예수를 구원주로 믿는지 그것을 확인해야한다. 교주, 또는 목사가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하는지 그것을 분별해야한다.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지 않거나, 신약의 구원주로 한정짓는다면, 그래서 예수님과 상관없이 직접 하나님과 연결된다면, 그것은 신약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다. 신약의 계시록에 나오는 ‘영생’과 ‘생명나무’는 주 예수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고, 그 열쇠가 주 예수이다. 주 예수를 부정하는데, 주 예수가 열쇠를 맡길 이유가 없다. 이것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그 누구라도 내 구원과 관련하여 “주 예수는 구원주”라는 것을 부정하면, 나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위대한 설명과 기적과 화려한 왕궁을 보여줄지라도 나는 결단코 그러할 것이다. 아멘!!
◆ 다시 쓰는 타락론
[창세기 2장]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중략)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3장]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중략)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나는 개인적으로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사람과 성적 지체로 해석하는 것을 찬성하고, 동의한다. 지금도 그러하다. 향락주의, 동성애를 막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처방은 ‘창세기 타락론’밖에 없다. 창세기 2장의 비유를 ‘이성문제’로 해석할 경우, 청소년의 성범죄도 막을 수 있고, 공부해야할 사춘기 때 신앙에 집중하게 할 수도 있다. 창세기의 타락사건을 ‘이성범죄’로 해석하는 곳은 통일교와 몇몇 종교단체가 있다. 이곳은 성적 순결운동이 매우 강하다. 교리가 절대적이라서 그렇다. “따먹으면 죽는다”는 것은 세상의 은어로도 이미 있고, 청소년에게 강력하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청소년 이성범죄를 막는 예방주사로서 ‘이보다 좋은 성경해석법’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한다.
그러나, 성경의 본질로 가보자. 창세기에 있는 에덴동산 현장에 가보자. 우리는 에덴동산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히는 에덴지역에 있는 00동산이다. 에덴지역은 마치 장안동과 같고, 동산은 00건물과 같다. 그 당시는 신석기 시대였으니, 밭농사와 목축이 시작됐다. 나의 동생이 고흥에서 ‘임마누엘’ 농장을 한다. 그러한 농장을 아담에게 줬던 것이다. 고흥 동강지역의 임마누엘 농장처럼, 에덴지역의 00동산이다. 여하튼, 에덴동산은 에덴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창세기의 그 동산’이니, 에덴동산이라고 하자.
‘따먹었다’ ‘선악과’ ‘임신’ ‘무화과잎’ ‘벌거벗다’ ‘동산중앙’ 등을 종합하면, 사람의 은밀한 그곳을 비유한다. 엑스제시스적 성경해석법처럼 보여진다. 엑스제시스적 성경해석법이 되려면, 본문에 충실해야한다. 지금 현대인들에게 생각되는 인식이 아니라, 창세기의 본문에 충실한 성경해석이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이 왜곡되지 않고, 엑스제시스가 된다. 본문을 벗어나면, 그것은 구약 창세기의 DNA가 아니다.
본문으로 돌아가보자.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하와에게도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다. 생명나무 이야기는 전혀 없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했다. 뱀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 ‘선악과’로 유혹했고, 그 선악과를 아담에게 줬다고 했다. ‘이성관계로서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백보 양보해도, 하나님이 ‘선악과 서리’ 사건을 놓고 심히 걱정하면서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말했다. 생명나무가 그 생명나무라면, 대략난감이다. 생명나무가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악나무와 생명나무’가 별도로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선악과 서리 사건은 종합하면 이렇다.
1. 선악과 따먹지 말라.
2.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
3. 아담도 선악과를 따먹었다.
4. 생명나무 열매는 따먹지 못했다.
5. 생명나무 열매를 지키려고 아담과 하와를 추방했다.
6. 화염검의 철조망을 쳐서 생명나무 길을 지켰다.
[창세기 3: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생명나무의 길’은 에덴 동산에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생명나무는 곧 영생과 관련된다. 하나님은 “그것을 따먹으면 영생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합리적 의심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무턱대고 이성관계로만 집착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기식 해석인 것이다. “선악과 사건을 이성관계로만 해석하는” 부류는 나의 주장에 대해 “모세가 성경을 잘못 썼다”라고 말한다.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고, 잘못된 주장인가? 시험지를 푸는 학생이 “시험문제가 틀렸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답이 정답이 되게 하려고, 시험문제가 틀렸다면서 시험문제까지 정정한다면, 그것은 억지다. 창세기의 본문 텍스트는 하나님이 설정한 ‘성문법’이다. 원문내용은 본질에서 변경될 수 없다. 생명나무 실과는 따먹지 못했고, 그 생명나무는 에덴동산에 보존된 것이 창세기의 매우 중요한 사건인데, 성적 타락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아이스제시스적 해석의 한계가 여기서 드러난다.
[고린도전서 15:45]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계시록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두 구절을 통해서 예수님=생명나무, 마지막 아담이므로 첫 아담=생명나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그리고 아담옆에 하와가 있었으니, 생명나무 옆 선악나무는 하와라는 풀이가 나온다. 예수님이 생명나무라면, 예수님 옆의 선악나무는 누구인가? 이때 세례요한이 등장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선악나무 역할을 했다면서, 두감람나무와 두증인의 논리가 등장한다. 모두 그럴 듯 하다. 첫 아담과 첫 하와, 마지막 아담과 마지막 하와, 이러한 논리 때문에 T종교는 독생자-독생녀 이론이 나온 것이다. 창세기 사건을 ‘결혼전 이성관계’로 해석하고서, 창세기법을 지키면, 아담과 하와의 그 전설을 이룰 수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전설의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과연 그곳에 누가, 무엇이 있겠는가? 전설의 의문을 인본으로 풀게 되면, 이처럼 무서운 결과가 돌출된다.
대표적인 아이스제스 해석이 ‘선악과 사건’이다. 예수님이 생명나무인데, 그 어디에 아담이 생명나무라고 되어있는가? 또한, 선악나무가 왜 세례요한인가? 너무나 어리석인 자기주관적 해석이다. 대통령에게 영부인이 있다. 또한 대통령과 부통령이 있다. 영부인과 부통령이 동일인물인가? 전혀 아니다. 대통령 옆에 영부인과 부통령 모두 존재할 수 있다. 유럽에서 ‘영부인들의 사진’이라고 찍혔는데, 그곳에 남자가 서있었다. 그 남자도 영부인이다. 남자와 남자가 결혼해서, 영부인 자격으로 찍힌 것이다. 아담옆에 하와가 있고, 아담이 생명나무이니 하와가 선악나무라는 설명은 자기주관적 모순이다.
창세기의 전설에는 오로지 ‘생명나무의 길’만 남아있고, 선악나무는 사라졌다. 선악나무는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없어진 것이다. 따먹었는데 없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음으로 생명이 사라진 것과 동일하다.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1억원이 있다고 하자. 그것으로 차를 샀다. 그러면 1억은 없어진 것이다. 그처럼 선악과는 없어진 것이다. 먹어서 그렇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뱀의 유혹을 받아서 하와가 속았고, 아내의 말에 아담이 속은 것은 확실하다. 선악과를 놓고 하와와 아담이 보이스 피싱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선악과는 없어졌다. 어디로 갔을까?
선악과 사건을 이성범죄로 해석해서, 따먹으면 죽는 것을 ‘영혼의 사망’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범죄하면 영혼이 죽으므로 그렇다. 그렇다고, 이성범죄만 없으면 그 영혼이 마귀로부터 자유롭고, 그 무엇을 하더라도 범죄가 아니라는 ‘선악과의 변질 이론’은 어찌 해야하는가? 이성범죄가 없다고 해서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 전혀 아니다. 구원은 생명나무를 통해서 가능하다. 생명나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을 모두 찾아와도 ‘선악나무’의 길에 대해서는 없다. 오로지 ‘생명나무’의 길이 전설로 남겨진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짓밟는다는 예언이 있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이 되어서 사탄의 머리를 짓밟고서 승리자가 된 것이다. 생명나무는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약의 주인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가 생명나무이다. 이것은 절대적 진리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를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로 비유해서 풀게 되면, 새로운 생명나무가 생길 수도 있다는 인본적 성경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성경은 절대로 성경안에서 풀어야한다. 헌법을 벗어나면 그 법률이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해도 불법이다. 모든 법률은 헌법안에서 법률이고, 모든 성경해석은 성경안에서 성경해석이다. 과연, 지체 비유로서 생명나무가 그것이면, 생명나무가 구약에도 있고, 신약에도 있고, 성약에도 있으니, 도대체 생명나무가 3개나 있다는 것인가? 사람에게 어찌 생명나무가 3개인가? 각 사람에게 ‘육체의 생명나무’는 오직 1개만 있듯이 생명나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다.
내게 생명나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대답할 것이다. 에덴동산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성경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선악나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율법이다”라고 말하겠다. 단지, 선악나무를 율법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의적 측면이 있다. 선악지식의 나무는 선악을 인지하게 하는 나무인데, 법을 통해서 선악을 인지하기 때문에 그렇다. 결과론적 해석일 뿐, 성경말씀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성경말씀으로는 ‘생명나무=예수 그리스도’가 정답이다. 그래서 각종 이단은 정답을 오답으로 만들려고 인본적 해석이 등장한 것이다. 절대로 속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