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심판과 물세례의 동질성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예수님은 성경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예수님이 곧 성경의 주인공이니, 가장 근본을 아신 것이다. 성경의 주인공은 반드시 그래야한다. 배를 만든 노아가 열쇠를 갖고 있듯이, 성경의 주인은 성경의 열쇠를 갖는 것이다. 구약의 감춰진 생명나무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생명나무는 오직 1분 주 예수이다. 그래서 구약도 신약도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 진리다.
내가 30년 있었던 종교단체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대립된다. 도무지 받아드릴 수 없는 정반대 주장은 양립불가 평행선이다. 같은 사물을 놓고서, 한쪽은 ‘남자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여자다’고 한다. 둘 중 1명은 틀렸다. 빛과 어둠은 양립할 수 없다. 빛, 아니면 어둠이다. 낮이면 밤이 아니고, 밤이면 낮이 아니다. 낮이면서 밤일 수 없다.
나는 그곳을 작년에 교리 때문에 떠났다. 언론인으로서 ‘그의 여성문제’는 결정적 증거가 없는 이상, 사실로 단정할 수 없다. 대법원 판결도 진실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요셉의 경우, 결정적 증거는 보디발의 아내가 말한 주장과 요셉의 옷밖에 없었다. 요셉이 강간을 한 것이 아닌데, 판결문으로 요셉을 강간범으로 매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셉이 사망했다는 증거 역시, 요셉의 피묻은 옷과 공범들의 주장밖에 없었다. 사실은 곧 진실이다. 구약에서 신약이 나오듯, 사실에 근거해서 진실이 나오는 것이다. 내가 완벽한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으므로, 사실처럼 보여지는 소리를 근거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이 신앙인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인격이다.
나는 교리, 즉 가르치는 진리에 관심이 깊다. 나는 작년에 그곳을 떠났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 성경을 새롭게 배우는 것이 내게는 흥미진진하다. 말씀은 곧 인생이 가야할 나침반이며, 길이다. 나는 새롭게 배운 내용을 통해서, 그동안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성경적 오류들을 앞으로 적으려고 한다. 내가 성경을 모르니, ‘트루먼 쇼’와 같은 우물안에 갇힌 몽유병같은 신앙에 빠졌다.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르고 무턱대고 “아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알아야, 책도 읽는다. 계몽(啓蒙)은 곧 계시(啓示)다.
뭔가 들려야 계시를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보이는 것도 계시(啓示)다. 성경이 새롭게 보이는 축복이 말씀의 은혜요, 진리의 성령이 오신 것이다. 나는 성경을 통해 내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내가 거짓으로 알았던 성경적 지식을 새롭게 정립할 것이다. 나를 통해 혹시 도움이 되는 새로운 신앙인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 아래 내용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고, 내가 새롭게 다니는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통해 배움으로 새롭게 인식한 내용과 노트기록을 보면서 쓴 신앙 칼럼이다. 칼럼의 목적은 내가 30년 있던 곳을 떠나는 자들에게 신앙의 지침이 되고, 남은 자들에게는 성경적 지혜를 얻어서 스스로 성찰하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마태는 세리 출신이다. 사채업자(私債業者) 특성은 꼼꼼하고, 따지기를 잘하고, 계산법이 확실하다. 마태는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완벽히 증거하고 있다. 모세의 대권을 이은 인물로 묘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족보를 자세히 보면, 몇몇 여성들을 기록하면서 사실적 족보에 편집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은 문학적, 신학적 편집이 들어있다. 그것을 이해하고서 읽어야 마태가 말하는 ‘예수의 사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심판(審判)을 제대로 모르니까, 물심판은 양심심판이라는 말을 한다. 너무 모른 무식의 소치다. 나도 몰랐으니까, 물심판을 양심심판으로 배워서 그렇게 인식한 것이다. 심판(審判)의 한자어는 살필 심(審) 판단할 판(判)이다. 審은 밭에 심는 벼를 의미한다. 모심기를 해본 사람은 얼마나 자세히 살펴야하는지 알 수 있다. 아주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 ‘심’(審)이다. 성찰(省察)에 사용되는 살필 성(省)처럼 깊게 살피는 것이다. 判은 2동강이다. 判은 半(반)과 칼(刂)이다. 수박을 칼로 “팍” 썰면 두 동강난다. 유죄와 무죄를 결정하는 것, 죽음과 생명을 결정하는 것, 존재와 부존재를 결정하는 것, 합법과 불법을 결정하는 것, 사형과 사면을 결정하는 것, 용서와 형벌을 결정하는 것, 그것이 곧 심판이다. 심판은 2가지로 쪼개진다. 사느냐, 죽느냐. 심판에서 살아남으면 그것이 행(幸)이다. 행복(幸福)은 심판을 면한 축복을 뜻한다.
물심판과 물세례는 동일한 의미다. 심판의 뜻을 징벌로만 아니까, 세례와 연결을 못한 것이다. 홍수심판을 해야만 심판이 아니다. 물세례도 심판이다. 침을 ‘퉤’하고 뱉는 것도 심판이다. 욕설도 말의 심판이며, 욕세례다. 세례(洗禮)는 씻는 예식이다. 세뇌(洗腦)는 뇌를 씻는 것인데, 사상교육을 할 때 반복적 학습을 통해 자주 사용하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세례(洗禮)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세례를 받았다. 씻는 정결의식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이방인은 부정한 존재로 여겨져서, 식사도 함께 안했다. 왕족이 백정과 식사를 하지 않았듯이 그러한 것이다. 정통 유대인이 있고, 개종한 유대인이 따로 있다. 트럼프의 사위 쿠슈너는 정통 유대인이고, 이방카는 개종한 유대인이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하라”고 외쳤다. 많은 강이 있는데, 왜 요단강에서 외친 세례요한을 말하고 있을까? 마태의 신학적 의도가 분명히 존재한다. 요단강이 의미하는 구약적 의미는 크게 5가지다.
하나는 가나안 입성이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대권을 물려주고, 요단강을 건너면서 가나안 정복이 비로소 시작한다. 요단강을 건넌 후에, 길갈에서 할례를 행했다. 할례(割禮)는 생식기에 칼을 댄 것이고, 피흘림을 통해서 깨끗케 되는 예식이다. 세례가 바로 신약의 할례다.
[여호수아 5: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둘째는 엘리야다. 엘리야와 까마귀밥(30개론)에서 요단강에 숨은 엘리야에 대해서 공부한 적이 있다. 까마귀는 우상숭배자라고 이론적으로 배웠는데,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이다. 마태는 그것을 은밀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예언했고,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요한 인 것을 ‘요단강’을 통해서 은밀히 암시한 것이다.
엘리야는 우상숭배자 아합, 이세벨, 바알선지자, 아세라 선지자와 싸웠다. 세례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비판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종교 지도자가 바로 바알과 아세라와 똑같은 우상숭배자라고 말한 것이다. ‘독사의 새끼’는 곧 창세기의 옛뱀을 말한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뱀의 후예들이었다.
셋째는 모세의 홍해바다다.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준 것은 모세가 홍해를 건넌 것과 연결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편지에서 모세의 홍해 기적을 물세례로 비유했다. 물세례는 곧 죄사함과 징벌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를 건널 때 뭍으로 건넜으나, 이집트 군대는 물에 수장됐다. 물세례는 동일한데, 나타난 역사가 각각 다르다. 축복과 심판의 징벌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히브리서 11: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넷째는 노아의 홍수심판이다. 홍수심판은 하늘위 궁창과 땅밑 궁창이 열리면서 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뭍이 사라졌다. 창조는 물과 물이 나뉘는 것인데, 홍수심판은 나뉜 물과 물이 합쳐져서 혼돈이 찾아온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존재는 배를 탄 노아 가족 8명이다. 홍해바다를 건넜으나 이스라엘 군대만 살아남고, 이집트 군대는 수장되었듯이, 노아의 가족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다섯째 창세기 1장 2절의 수면이다. 성경 텍스트에서 ‘물’은 곧 혼란과 무질서를 상징한다. 창세기 1장 1절에도 혼돈의 물이 있었는데, 그 물이 나뉘면서 질서의 창조가 시작된다.
‘요단강’과 ‘세례’를 통해서 마태가 의도한 신학적 메시지를 인지하고서 성경을 자세히 읽어야한다. 그래야 물세례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물세례는 곧 ‘축복과 심판’을 동시에 의미하며, 죄가 있는 사람이 세례를 받으면 심판이 떨어진다. 그래서 회개를 하라고 한 것이다. 회개는 뉘우침과 열매가 동시에 필요하다. 회개하지 않고서 물세례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것이다. 이 사건을 놓고서,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교단에 들어가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은 마태의 의도를 전혀 모른 것이다. 그것과 전혀 다르다. 편견의 안경을 벗고서, 마태의 관점으로 봐야한다. 마태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가신 것은 심판주가 심판을 받으러 가신 것과 똑같다. 세례요한이 볼 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물세례를 받으려고 하시니 극구 만류했던 것이다. 요단강물은 수많은 백성들의 죄를 씻느라고 더렵혀진 구정물인데, 그 요단강물에 예수님이 직접 들어가신 것이다. 죄인을 구하려고 죄인이 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희생의 어린양이다.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은 것은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다.
어린양은 세상 죄를 짊어진 제물을 말한다. 내보냄을 당하는 희생양으로, 제사장이 끌고 가서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린다. 백성의 죄를 담당해서 절대로 마을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영원히 추방했다. 어린양의 머리위에 백성의 모든 죄를 올려놓고서 내몰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받은 물세례가 그것이고, 십자가에서 받은 피세례가 그것이다.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이셨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마태복음 3장 15절에서 말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은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MOU 체결이 아니다. 심판주가 스스로 심판을 받는 물세례가 바로 ‘모든 의’에 해당된다. 이는 이사야서 53장에 예언된 내용이다.
[이사야서 53장]
1.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2.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물세례를 받고 올라오시니,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예수님께 임했다고 마태는 기록했다. 곧 홍수심판이 끝나고 비둘기를 내보낸 노아를 연상케 하고, 창세기 1장 2절에서 수면위를 운행하신 하나님을 암시한다. 새로운 창조역사를 의미하며, 십자가 사건 이후에 진정한 부활을 뜻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요단강의 물세례에서 시작해서 골고다 십자가 피세례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음성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백성을 징벌하지 않고 그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믿는 자에게 구원의 길을 허락하신 것이다.
누가 가룟유다인가? 예수님을 판 자가 가룟유다다. 맞다. 그렇다면, 왜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부활후에 회개하지 못하였을까? 베드로를 포함해 모든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도 제 갈 길을 갔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제자들을 죽였고, 살인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받고, 가룟 유다는 구원을 못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가 바로 ‘가룟 유다’이다. 2천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동일하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누구든지 이집트 군대처럼 수장될 뿐이다. 가룟 유다는 자살했듯이, 믿지 않음으로 구원에서 배제된 것이다. 예수님은 심판주로서 심판받을 백성의 자리로 기꺼이 내려가셨다. 심판주가 죄인의 자리에서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그를 통해 구원을 얻었음을 확증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