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누가의 누가복음은 외국인의 관점에서 기록한 예수님의 사역이다. 예수님이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하자. 그러면, 누가는 탈북자 또는 외국인 노동자 신분이다. 마태는 열성팬, 요한은 비서실장이다. 관점이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보는 한국과 외국인이 보는 한국은 전혀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보는 ‘나’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갖듯이 그렇다.
누가가 말했으면 그것은 99% 사실에 근접한다. 누가의 기록이 그렇다. 마태의 기록은 그렇지 않다. 마태는 편집자의 의도가 너무 많이 첨가되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을 설정하고서 기록한 문서가 마태복음이다. PD저널리즘과 흡사하다.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서 모든 사료를 취사선택해서 편집한 것이 마태복음이고, 누가는 “실제 사건인가?”에 상당히 큰 방점을 두고 있다. 누가의 성격이 그랬다. 기자 저널리즘이 매우 강한 인물이 누가다.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우리’라는 주어가 갑자기 등장한다. 사도행전 16:16이다. 그 전까지는 3인칭이 주어였다. ‘우리’라고 쓴 그 시점이 누가가 함께 동참한 기록이고, 나머지는 들었던 내용을 확인하면서 작성한 것이다. 누가의 기록은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에 상당히 강함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사실과 진실에서 ‘진실’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진실과 진리, 진리(眞理)는 ‘진실의 다스림’이다.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말’이다. 거짓과 진실은 상반된다. 진실과 사실의 관계는 무엇인가? 사실의 사실이 곧 진실이다. 진실은 ‘진짜 사실’의 줄임말이다. 2번 확인해도 사실인 것이 진실이다. 1번 확인했을 때 사실이 아니면, 그것은 진실이 될 수 없다. 2번 검증을 통과한 사실이 곧 진실이다. 그래서 진실은 사실에서 나오는 것이다. 검증된 사실중에서 다시 검증해서 사실일 경우, 그것이 진실이다.
고등학교의 목표는 대학이다. 물론 취업하는 경우도 있다. 수시와 정시는 원서접수를 통해서 진행된다. 대학마다 합격 통지서를 보낸다. 1차 합격과 2차 합격이 있다. 1차 합격해야, 그 합격자를 대상으로 다시 면접을 보면서 2차 합격을 선정한다. 진실은 2차 합격자를 의미한다. 2차 합격은 1차 합격을 했기 때문에, 2차 합격도 해야한다. 1차 합격&2차 합격이 최종 합격인 것이다. 진실이 되려면, 사실에 근거해야한다. 사실에서 벗어나면, 1차 합격을 하지 못했으므로, 2차 합격도 불가능하다.
“손석희의 최초 보도, 태브릿 PC가 조작됐으니 탄핵도 무효다”는 논리는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다. 사실과 진실을 따지는 것은 각각 사건을 분리해서 따져야한다. 태브릿 PC가 조작된 것이 사실이면, 그것이 사실이다. 탄핵은 ‘탄핵된 것’이 사실이다. “조작된 태브릿 PC로 탄핵됐다”는 새로운 사실이 등장한 것이다. 사실과 진실의 관계는 이렇게 따지는 것이다. 누군가 ‘진실’을 폭로하면, 그 진실은 사실로 검증하면 된다. 2번 검증해도 진실에 모순이 없다면 그것이 진짜 진실이다.
재건축재개발 현장에 가면 ‘유언비어’가 많이 나돈다. 나는 너무 많은 사건들을 접했기 때문에, 그때마다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에 따라 기사를 쓴다. 소설을 쓰면, 결국 언론중재위원회에 가서 낭패를 당하기 때문이다. 허위기사는 기사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 기사의 생명은 ‘사실’이다. 사실을 확인하는 방법은 확인된 사실을 쓰고, 그것에 모순이 없도록 기록해야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역사기록의 필수항목이다. 음식에 소금이 절대적이라면, 기자에게는 ‘사실확인’이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진실을 말할 때는 그 진실이 사실에 기초했는지, 매우 심각하게 따져야한다. 진실은 검증된 사실이므로, 어떤 비판도 거부해서는 안된다. 재건축재개발에서 해임총회를 하고서, 서면결의서를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서면결의서를 기초해서 해임총회가 가결됐는데, 기초 사실인 서면결의서를 공개하지 않으면서 해임총회가 가결된 것만 믿어라고 하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기초사실을 확인해주면서, 최종 사실을 발표하는 것이 ‘진실’이다. 한국사회는 ‘진실’을 함부로 사용하면서 ‘진실의 가치’가 추락했다.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자료, 진실은 의혹의 주장 정도로 평가된다. 그러나, 사실은 반석처럼 확실한 사건이며, 진실은 그 반석이 반석인 것을 다시 입증한 것이다. 사실과 진실의 단어를 그렇게 인지하면, 두 단어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 사실은 1차 합격, 진실은 2차 합격이다.
진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결국 사실을 확인함으로 그 비밀을 알게 된다. 사실이 아닌 것은 쳐다볼 가치도 없다. 진실은 사실위에 있는 것이지, 사실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렇다. 누가복음은 이런 관점에서 ‘사실의 사실’을 추구한 진실한 복음서이다. 매우 철저한 사료확인을 통해서 본인의 의견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들은 것과 본 것과 확인한 것을 객관적으로 서술했다고 할 수 있다. 나도 이러한 관점위에서 인생을 살아야겠다.
요셉은 강간범이다는 말은 사실이다. 이집트 법률에 의해 강간범이라고 판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은 강간범이니, 보디발 아내를 강간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강간한 영상이 없는 이상 이런 주장은 믿을 수 없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아서 그렇다. 사실의 확인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보디발 아내는 요셉이 강간했다고 말했다”가 사실이다. 보디발 아내의 말을 인용해서 표현하면 그것은 사실확인에 맞다. 반면, “요셉은 강간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말도 사실인 것이다.
요셉은 죽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지만, “요셉은 죽었다”고 야곱이 말했다면 야곱에게는 그것이 사실이다. 야곱은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셉은 죽지 않았다. 요셉의 사망사건, 요셉의 누명사건은 무엇이 사실인가? 무엇이 진실인가? 10형제(베냐민 제외)의 말이 사실인가? “10형제들이 요셉이 죽었다고 말했다”라고 말해야, 그것이 사실이다. 사실의 확인을 적을 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A가 어떤 말을 했으면, A가 “0000”라고 말했다고 해야한다. A를 빼고서, 어떤 사건을 본인이 직접 목격한 것처럼 말하면 그것이 거짓말이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된다. 그렇게 할 경우, 요셉의 사망사건의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말하면, 그것은 확인불가능한 사실이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됐다”도 확인불가능한 사실이다. 사람으로서 어찌 그 사건을 확인할 수 있는가?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했다”고 말하면, 그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표현법을 정확히 깨닫게 되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속는 횟수’를 줄일 수 있다.
** 眞은 제사솥에서 제물을 떠서 먹는다는 의미로 맛본다는 뜻이 있다. 신앞에 음식의 정결함을 의미한다. 진실은 곧 사실을 다시 맛봄으로 확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