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설교에서 목사님이 “창세기는 요셉에서 끝나지 않고, 유다 이야기를 예고하면서 끝난다”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들었던 성경강해와는 전혀 달랐고, 망치로 얻어 맞은 것 같았다. 요셉으로 끝나는 창세기가 아니고, 유다로 끝난다니…. ‘유다의 회심’이라고 했다. 창세기의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를 통해 예수님의 족보가 이어진다. 그 유다를 말하며, 레아의 4째 아들이다. 이복형제들이 요셉을 죽이자고 했을 때, 인신매매로 중재를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20냥을 받고 미디안 상인에게 요셉을 팔았다. 그 유다가 창세기 드라마의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장식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으러 오셨다”는 그 문장을 이해하고, 받아드리기까지 나는 30년이 걸렸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생명을 살리러 오셨다”라고 풀어서 설명했으면, 더 빨리 납득했을까? 금일, 창세기를 다시 읽으면서, 유다의 회심 장면에서 울컥했다. 그리고, 야곱이 요셉의 생존소식을 듣게 되는 장면도 얼마나 감동적인지… 더불어, 야곱이 바로왕앞에서 그를 축복하는 장면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보여준다.
자신을 팔았던 이복형제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배할 때, 그것을 내려다보는 요셉은 “쌤통이다. 이제 복수다. 행한대로 갚으리라. 본 때를 보여주리라. 나의 하나님은 죄악을 멸절하고자, 절호의 기회를 주셨다. 나에게 행한대로 형벌을 받고 굶주림을 당했다. 징벌의 심판이 이제 시작이다. 너희만큼은 곡식을 줄 수 없다. 내가 당한 그 치욕이 잊혀지지 않는다”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분명 떠올랐을 것이나, 이복형제들을 향한 그리움이 앞섰다. 이복형제들은 요셉을 판 것에 대해 20년동안 후회했고, 요셉은 고자질하면서 교만했던 자신을 날마다 반성했을 것이다. 보디발 아내가 누명을 씌웠을 때조차 요셉은 변명하지 않고 묵묵히 참아낸 것을 보면, 인생의 무게와 깊이가 완전히 달라졌다. 요셉이 베냐민에게 누명을 씌우고, 그 이복형제들이 어찌 하는지 확인하는 장면은 감동 그 자체다.
[창세기 44장]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종으로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고하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옵소서 (중략) 청컨대 주의 종(유다)으로 아이(베냐민)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창세기 45장]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회개는 유다처럼 해야한다. 자신이 20년 전에 지은 그 범죄(요셉을 팔았던 것)을 생각하면서, 베냐민을 위해서 자신이 대신 종이 되겠다고 진실로 고백하고, 요청하니, 요셉의 마음이 풀어진 것이다. 아~~ 얼마나 감동적인 인생 드라마인가. 읽어도 읽어도 지루함이 없다. 내 삶속에, 내 교회에, 내 주변에, 내가 떠난 곳이나 내가 있는 곳이나, 모든 곳에서 이런 용서와 회개의 감동 스토리가 있으려나…. 요셉과 11형제의 이산가족 상봉을 하나님은 그때 드라마 보듯 보고 계셨으리라. 미소 지으면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