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고 했다. 나는 항상 그 구절을 읽으면서, 7천년과 7일을 축소확대로 비유해서 생각했다. 오늘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루가 천년같음을 알게 됐다. 하루는 천년이다. 그렇게 내일도 천년을 살고, 모레도 천년을 살고, 그렇게 수십만년을 주님과 함께 살아가, 주님께 가리라.
30년간 몸과 정신을 담았던 곳을 떠나니, 모든 것이 새롭다. 그곳을 떠나면 3가지 부류로 나뉜다. 분노의 활화산이 폭발해서 무신론자의 현무암이 되는 경우, 그 활화산이 펄펄 끓어올라서 용암의 극렬한 반대자가 되는 경우, 극렬한 반대자는 ‘가라지’로 불린다. 그렇게 부르는 것도 성경적이진 않다. 가라지로 부른 그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라지면 어쩌랴!! 세 번째 부류는 예수님께로 돌아가는 경우다. 나는 3번째다.
내가 그곳을 떠나니, 나를 반겨준 곳에선 나의 30년을 지우려고 한다. 나는 거부했다. 30년간 있었던 그 소중한 추억이 어찌 거짓일 수 있는가? 그 또한 형식이요, 잘못된 생각들이다. 북한에서 남한에 왔다고 해서, 무조건 세뇌를 세뇌로 바꾸려는 발상,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는가?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면 그 누구도 그것을 나눌 수 없다. 이혼증서는 몸만 나눌 뿐이다. 신앙도 동일하다.
JPG 파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왜 글씨를 맘대로 바꿀 없느냐고 반문한다. 바꿀 수 없다. 그 이유는 사진과 글씨가 모두 하나로 합쳐져서 결혼했기 때문이다. JPG 파일은 본래 PSD 파일로 존재한다. PSD 파일은 글씨와 사진이 각각 구분해서 존재한다. 레어어(투명비닐)로 구분해서 사진위에 글씨를 쓸 수 있게 한다. PSD가 없으면, JPG는 글씨를 고칠 수 없다. 그처럼, 합쳐진 것은 나뉠 수 없다.
나는 이혼한지 10년째다. 전처의 이름만 남아있으나, 가끔 기도하면 그녀의 이름이 생각난다. 더불어, 함께 있었던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10년이 지났지만, 솔직히 그립다. 그립지 않을 수 있는가? 나와 나의 전처만이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날들이 있다. 슬펐어도 그리움이고, 누구도 모르는 아픈 감정들이다. 유일한 사연들이다. 이혼증서가 그러한 감정까지 결별할 수는 없다. 그처럼 하나된 것은 둘이 될 수 없다.
내가 30년간 있었던 곳에서 가장 의문을 품었던 것이 ‘성자와 예수의 분리’였다. 그는 성삼위일체에서 성부(聖父)+성모(聖母)+성자(聖子)를 각위(各位)로서 명확히 구분하고,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으로서 하늘의 가정이 있음을 공표했다. 아멘!!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런데, 그 성자가 예수님과 전혀 다른 존재라고 증명했다. 아멘!! 나는 그것도 믿는다. 혼란스러웠으나, 믿게 됐고, 지금도 동일하다. 요한복음에는 성자와 예수가 일체라고 설명했으나, 나는 성자본체가 예수님께 임재했다고 믿고 있다. 그것이 논리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경해석이 성자예수의 결합관계에 이혼증서가 될 수는 없다. 어찌 그는 판사가 되어서 성자와 예수의 결합을 ‘이혼판결’로 판결할 수 있는가? 게다가, 성자와 자신이 결합한 것으로 재결합을 선포할 수 있는가?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그곳을 떠나면서, 예수님과 성자본체는 본래 하나로 존재하고 계심을 믿게 됐다. 성경해석으로 성자예수가 성자와 예수의 결합관계임을 밝혔다고 해서, 그 관계가 결별되는 것이 아님을 나는 믿게 됐다.
부부가 서로 결혼하면 남편과 아내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 결합관계에 대해서 누군가 알게 됐다고 해서, 그 관계가 이혼을 하는가? 이혼은 당사자끼리 문제이지, 제3자의 개입으로 결정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멘!! 예수님과 성자는 서로 좋아서, 서로 사랑해서, 죽음의 십자가에서 이미 결합해서, 그렇게 일체된 사랑의 관계인데, 그 누가 그것을 나눌 수 있는가!!
성자예수는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