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교육이 핵심이다. 인성교육도 중요하고, 진로교육도 중요하지만, 교육과정을 통해서 각 학생들에게 설정된 목표를 책임지고 가르치고, 담임교사는 학생을 책임있게 교육하는 것이다. 학교처럼 교회도 그래야한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담임목사님의 책임성이 매우 강하다. 단상에 서면, 50분 정도 시간으로 말씀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불을 뿜는다. 오직 성경이다. 군대로 비유하면, 특공대다. 옮긴지 얼마 안됐지만, 특권의식의 선민사상을 철저히 경계하면서 ‘교만금지’를 훈육하는 것이 깊게 와 닿았다.
언젠가 설교에서, 누가복음에 집나간 탕자 이야기를 하시면서,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갑자기 첫째 아들로 변환되는데, 나는 정말로 충격을 받았다. 말씀의 은혜를 받다보니, 드라마 보는 재미가 점점점 식어지고 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래도 최고로 재밌다.) 주일예배와 수요예배가 드라마처럼 기다려진다. 반전의 반전이 있는 드라마같다. 장자는 집안에 있는 탕자였다니…. 차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 탕자, 장자는 아버지의 마음을 떠난 탕자였다. 둘 모두 아버지보다 아버지 재산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런 깊은 내막을 어디서 들을 수 있으랴!!
죄속에 사는 자와 법속에 사는 자,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쉬울까? 오늘 말씀을 들어보니, 죄속에 사는 자들이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쉽다는 결론에 이른다. 율법의 도덕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은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오류에 빠지고, 나아가 하나님을 통제하는 무서운 선민사상의 교만에 물들 수도 있다.
‘교회가 하나님을 통제하는 죄에 빠지면 안된다’는 말씀이 단상에서 선포될 때, 나는 바짝 엎드렸다. 나는 항상 가인을 범죄자로 생각했고, 도덕군자 아벨은 아름다운 선행에서 출발한 그 제사가 의로움으로 열납받은 것으로 착각했다. ‘제단’을 교회로만 생각해서 그런 착오가 생겼다. 열납은 곧 구원이다. 열납(悅納)은 기쁘게 받아드림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곧 열납이다. 예배드리는 성도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진정한 열납이다. 그것이 곧 구원이다.
죄에 빠졌다가 회개하는 것과 도덕적 선행으로 남을 정죄하고 분노하는 것,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가 의로운가? 정죄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은밀한 범죄다. 하나님께서 그 누구를 구원하실지 아무도 모른다. 교회출석이 구원의 증표가 아니다. 십일조가 구원을 얻는 수강료가 아니다. 건축헌금이 구원의 보증수표가 될 수 없다.
“십계명은 이집트를 떠난 후에 주어졌습니다. 십계명을 지켜야 이집트에서 꺼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십계명과 아무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 주일설교 요약노트
수요예배 말씀잔치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