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영원한 주인은 누구인가?
‘교주’라는 호칭이 상당히 부정적이다. 그러나, 교주는 좋은 말이다. 기독교의 주인을 줄여서 ‘교주’라고 한다. 예수님은 기독교의 주인으로, 교주다. 천주교는 베드로가 주인이 아니다. 예수님이 주인이다. 그런데 교황이 베드로를 근거로 ‘열쇠’를 받았고, ‘반석’위에 세워졌다면서 주인행세를 한다. 베드로의 반석과 게바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설령 같다고 해도, 베드로의 주인행세는 ‘가등기’이지, ‘본등기’는 아니다. 만약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구원의 사명을 맡겼다면, 베드로는 “갈릴리 베드로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죄사함을 받고, 병고침을 받아라”고 했을 것이다. 전혀 아니다.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고침을 받았다. 천주교와 기독교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다.
‘열쇠’ 개념은 ‘주인’이 아니다. ‘관리’의 개념이다. 어떤 교회는 목회사역을 상속까지 한다고 하니, 자본주의가 교회를 점령한 단면을 여과없이 보는 것이다. 그런 교회는 그리스도가 진정 주인이 되지 못한다. 교회 핵심은 교주가 누구냐이다. 기독교의 교주는 ‘예수님’이다. 그것을 절대적으로 실천하는 교회마다 그리스도와 말씀 중심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초대교황으로서 십자가에 메달려 죽었다. 순교를 하는 순간 자신을 따르는 명예는 모두 박탈당한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 길을 순종했다. 주인이 예수님이라서 그렇다. 열쇠를 ‘소유권’으로 착각하면, 아담과 하와처럼 뒤통수를 맞는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독차지했다. 동산 중앙의 나무를 제외하면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대박 사건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자,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방 빼”라고 했다. 아담과 하와는 세입자였던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의 진정한 주인은 예수님이며,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방 빼”라고 하면, 빼야한다. 어쩔 수가 없다. 인생은 영원한 세입자 신세다. 영혼의 건물주는 곧 창조주다. 창조주에게 잘 보여야지, 보이는 건물주로서 교주와 목사와 대통령에게 잘 보이면 안된다. 근본을 논하는 것이다. 섬김의 대상이 누구냐를 말하는 것이다. 섬김의 대상이 사람이면, 그것이 곧 이집트의 파라오다. 우상숭배가 멀리 있지 않다. 보이는 사람을 숭배하면, 그것이 우상숭배다. 보이지 않는 신을 숭배하면 그것이 신앙(信仰)이다.
“떡줄 사람 생각도 안하고 김칫국물부터 마신다”는 격언이 있다. 보이는 사람을 섬기면 ‘김칫국물’ 신세가 된다. 야곱이 어머니 말도 잘 듣고, 아버지 말도 잘듣는 효자로 살았지만, 아버지 이삭은 축복기도 정보조차 야곱에제 주지 않았다. 그 축복기도를 거짓말로 속여서 탈취한 댓가는 가혹했다.
하나님의 축복이 그렇게 온다면, 이 세상은 아비규환이 될 것이다. 짐승의 뺏음이 신의 뜻이라면 이 세상은 공룡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롭다. 야곱의 탈취사건은 ‘추방’으로 결정됐다. 이것이 진실한 정의다. 뺏으면 뺏긴다. 거짓말하면 속게 된다. 그래서 속임수는 그 누구라도 옳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 야곱은 라반을 14년 섬겼지만 그 댓가는 데릴사위로서 노동력 착취였다. 하나님을 절대로 믿은 이삭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그 결과는 참혹했다.
라반이 섬긴 하나님, 드라빔의 축복도 다를 바 없었다. 교회안에서 봉사하면서 제도권의 혜택을 받는 것이나, 교회밖에서 세상의 제도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인생은 거기서 거기다. 야곱처럼 섬김의 노예일 뿐이다. 결국, 위를 봐야한다. 하나님은 영원한 축복을 주신다. 사람의 축복은 제한적이고 구속한다. 하나님은 아무런 댓가없이 무한대로 축복하시고, 그 기간도 영원하다.
우리의 영원한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