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은 손가락 10개의 상형이다. 또한 숫자의 오메가이다. 또한 예수님 사역의 완성이다. 또한 모세 사역의 마지막 재앙이다. 또한 ‘덧셈 기호’이다. 또한, 또한, 또한…… 그 상징성은 무한하다. 내게 십자가는 손가락 10개로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묶였다. 2012년 2월 처녀작 ‘한자 쉽게 나누기’(베스트셀러)를 출간하고, 정확히 7년째다.
나는 텅빈 시간을 혼자 빈둥빈둥 놀다가, 시간 죽이기를 보내려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수레바퀴를 돌려야하는 구원의 운명앞에서 인생은 참 무료하고, 텅빈 우상처럼 감정을 죽여야한다. 그래도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기쁨과 미움과 사랑과 그리움과 절망과 행복의 감정을 느끼면서 글을 통해 승화하면서 살아냈던 것 같다. 기계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던 지난 세월이었다.
오늘은 내게 두 친구가 전화했다. 한 친구는 고향 친구, 다른 친구는 교회 친구다. 교회 친구는 상당히 부담이 되었다. 이념의 전쟁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 그것은 인간관계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상이 다르면 이미 판단하기 때문이다. 감정이 배제된 이념의 우상들이여!!
복음서를 가만히 읽으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괴롭다고 친구들에게 하소연했던 예수님의 현실적 고통이 깊게 느껴졌다. 인성을 가진 예수님의 그 괴로움을 누가 알리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호칭했으니, 진정한 친구는 허심탄회하게 서로 대화하는 것이고,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념은 공산주의처럼 무섭다. 종교가 이념이 되면, 그것은 전쟁뿐이다. 전쟁은 곧 판단과 정죄다.
그리하여, 그들은 내게 묻는다. “왜 판단의 글을 쓰느냐”고. 그런 질문과 요청이 지속적으로 온다. 들려온다. “살아야겠기에!!” “이념의 땅에서 인내롭게 호흡해야겠기에!!” 아!! 알고 있던 진리가 허물어지는 그 비참함을 아는가? 완벽한 성전인줄 알았는데, 바벨탑인 것을 확인하는 당혹감을 아는가? 결국, 보이스 피싱처럼 ‘확인의 책임’을 못한 나의 책임이다.
“떠날 자 떠나고, 남을 자 남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그 소명의 길을 가는 것이다. 운명의 열쇠는 항상 하나님께서 잡고 계신다. 훗날의 향방을 그 누가 알리요. 단지, 나는 성경을 깊게 본다. 30년 있었던 곳을 나오면서 내게 생긴 버릇이다. 구명보트를 붙잡듯, 성경을 붙잡고 내 영혼이 호흡을 한다. 살아야겠기에!!
루터는 교황청을 떠났고, 교황청에는 남은 자들이 있었다. 교황청에 남은 자들은 루터의 개혁때문에 교황청을 새롭게 개혁했고, 루터는 루터의 길을 갔다. 누가 옳고 틀림이 아니다. 각자에게 하나님은 다른 소명을 주시고, 맡은 위치에서 그 일을 할 뿐이다. 한 사람은 이곳에서, 다른 사람은 저곳에서 지구촌 지상천국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단들은 자기들만 옥토밭이라고 우기는 것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집안의 장자’이거나, ‘집나간 차자’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집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떠날 수도 있고, 집을 나갔으나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돌이킬 수도 있다. 결국 인생은 ‘하나님의 마음 알기’다. 어디에 있든지…..
30년을 살았건만, 마음 깊게 사귄 교회 친구가 이렇게 없을 줄이야. 얼마나 애정이 메마른 종교단체였던지, 내가 과연 그러한 인간성을 가진 것인지, 스스로 반성하게 된다. 사람이 감정이 없다면, 그것은 기계인간이다. 감정은 곧 마음이다. 어떤 사상이 아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끝까지 “사람은 떡으로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대답했다. 사람이신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길을 걸어가셨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이다. 사람은 곧 죄도 짓고, 넘어지고, 슬프고, 의심하고, 도망치고, 피곤하고, 고단한 존재다. 그러한 감정을 온 몸에 입고서 사셨던 것이다. 감정은 곧 사람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친구는 그러한 감정을 서로 공유하고, 말하고, 위로하고, 이해하는 관계인 것이다.
48세, 살아보니 친구 몇몇이다. 예수님과 다시 친하게 지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