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장 25절 사연을 읽는데 자꾸 눈물이 난다. 자비(慈悲)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답안지를 읽으면서, 자꾸 마음이 아린다. 율법교사는 교육강사, 교역자, 강도사 정도의 직분이다. 예수님께 지식을 자랑하려고 “영생”에 대해 질문하자, 예수님이 도리어 율법교사에게 질문하니, 그가 정답을 말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했다.
이에 율법교사는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웃’의 본질을 묻는 것이다. 율법교사의 이웃집에 사는 그 이웃이 아님을 전제한 물음이다. 진정 사랑하여야할 이웃은 누구인가? 그때 예수님은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 이야기를 한다. 강도를 만나서 옷이 벗겨지고, 폭행을 당하고, 거의 죽게 된 자를 만나니, 제사장은 피해서 도망갔고, 레위인도 도망갔고, 사마리아 사람은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서 응급조치를 취한 다음에 주막집으로 데려가서 보살펴 주었다. 강도를 만난 이 사람에게 누가 이웃인가?
나는 이혼했다. 10년째다. 누구도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지난해 내 영혼의 문제를 좌우할 교리의 암초에 부딪혔다. 나는 내가 강도를 만난 것조차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침통하였고, 나는 구원을 간절히 갈망하였으나, 나에게 구원의 밧줄을 준 곳은 예상하지 못한 곳이었다. 내게 사마리아인과 같은 곳에서 위로와 자비와 구원의 손길이 전해졌다. 애석한 일이다. 30년을 몸담았던 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온정이 새로운 곳에서 왔으니, 내 영혼은 멸망에 처했다가 무덤속에서 부활하였다. 내게는 누가 이웃인가?
나는 이단의 강도를 만났다. 이단에 속했을 때는 악평의 강도를 만났다. 그때만 해도 나는 강도를 만났으니,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성경을 통해서 무엇이 옳은지 간구하고 헤매었다. 내가 30년 머물렀던 곳에서는 당시 내가 만났던 강도에 대해서, 악평의 강도만난 나의 의문에 대해서, 속시원히 답을 해준 사람이 없었다. 이후 모든 진실을 확인하고서 내가 30년간 비진리의 무덤에 갇혔음을 알게 되었다. 그 참혹함은 내가 견딜 수가 없었다. 과연,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내가 그곳을 떠나므로, 내게 연락이 오는 사람들은 의무감인가? 진정 나의 구원을 위함인가? 죽을 각오로 십자가를 졌던 예수님의 그 심정까지는 아니었으나, 나는 그 두려움의 방향으로 내 인생을 맡겼다. 그리고, 비로소 홍해가 갈라지듯이 내 인식관에 새로운 발견이 보였다. 가라지, 악평자, 김경천 목사, 정바울 목사 등등 그 많은 사람들의 주장이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고 치부하였으나, 지금은 ‘의미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한에녹의 영원한 복음 사건이 가장 컸다. 남의 것을 함부로 도용했으면서, 그것을 함구하고서 마치 자신이 깨달은 것으로 속인 것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 결정적 사건으로 나는 내가 알고 믿었던 모든 진리를 ‘지식의 교리’로 객관화시켰고, 확인작업을 시작하였다. 진리는 곧 성경이므로, 성경으로 기존 교리를 검증했더니, 곳곳에서 맹점이 드러났다. 아!! 비진리의 강도만난 내 인생이여!!
‘가만히 있어라’고 했으나, 그 절대믿음으로 침몰했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세월호 참사는 더 큰 것으로 예고한 신호탄에 불과했다. 결국 어찌 되었던가? 관련된 정권이 몰락했고, 기독교복음침례회 교주는 도망치다가 사망했다. 어찌 이름이 그렇게 비슷했던지….. 이제야 나는 내가 있던 곳이 어떠한지 실상을 알게 되었다. 그대로 있었더라면 내 구원은커녕 그 무너짐이 어떠했을까? 끔찍하다.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구절은 어떤 성경해석이 불필요하다. 주 예수가 독생자이다. 그 구절에 대한 성경해석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