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떤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는 적은 성가대원을 데리고서 주일예배에 찬송을 지휘하는데, 그 손짓 몸짓 열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생각이 깊어졌다. 불가사의한 예술 작품은 그 기묘함에 대해 알고 싶듯, 찬양과 웃는 얼굴로 집단폭행을 감사함으로 순교당한 스데반의 죽음에 대해 사울이 의문을 품듯, 그 작은 무리를 데리고 찬양을 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이 궁금했다.
마치 이런 것이다. 고시생이 사법고시에 합격하려고 밤샘 공부하거나, 서울대 본고사를 준비하려고 밤샘 공부하거나,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밤샘 연습하거나, 우리는 충분히 그 열정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쪽지시험이 있는데 그것을 준비한다고 밤샘 공부를 한 것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오페라를 자주 보다보니, 진정 귀한 가치를 상실한 사람의 눈으로 보다보니, 적은 무리를 적게 봐서 그랬던 것이다. 그 교회 성가대 지휘자가 옳았다. 적은 무리를 책임지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것이다. 그보다 아름다운 선율이 또 어디에 있으랴. 하나님은 로마 황제의 잘 차려진 제우스 신상의 뷔페를 제물로 받지 않으셨다. 초라하게 누명쓰고 말씀에 순복한 적은 무리의 종교 지도자 예수님의 어린양 제사를 받으셨다. 스스로 제물이 되었으니, 스스로 백성의 죄를 담당했으니,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모든 간구와 기도를 흠향하시고, 인류의 초석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적은 무리를 데리고 찬양하는 것, 그것은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깊은 감동을 주었다. 결국, 인생은 홀로 남겨진 자신의 교회다. 내가 나를 책임질 수 있는가? 내가 나를 목회할 수 있는가? 내가 나를 말씀으로 먹일 수 있는가? 자취생활하듯이 성령의 불을 지펴, 말씀의 밥을 먹을 수 있는가? 어렵지만, 결국 가야할 말씀의 길이다.
어떤 큰 단체 종교 지도자는 “몇백명, 몇천명 앞에서 테니스를 하는 것이 쪽팔리다. 세계적인 선수들도 수백만명 관중이 몰리는데, 몇백명앞에 신의 테니스를 보여준다는 게 얼마나 창피한 일이냐”고 호통친 적이 있다. 그 설교를 듣고서, 나는 테니스를 보는 것을 멈췄다. 그때 그 장면과 성가대 지휘자가 너무 비교되었다. 적은 무리를 데리고,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믿고, 하나님이 오셨다고 믿고, 그 사역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인생이 가야할 마땅한 십자가이다. 많고 적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지금 보시느냐, 아니냐, 그것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마음 담아서 정성 담아서…..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하는 것이다. 아멘!! 내가 쓰는 글도 수만명이 읽지는 않아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꼭 챙겨 보시리라. 내 모든 정성을 담는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 그것이 신의 소명이다.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