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한자적 정의는 ‘언행일치’다. 믿을 신(信)은 사람과 말씀(言)이 합쳐졌다. 믿음을 평가하는 기준점이 ‘말’에 있다는 것이다. 믿을 수 있는가? 그것은 행동보다는 말로서 판단한다. 말을 하고, 그 말대로 하느냐, 그것으로 믿음의 척도를 삼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요한이 태초에 있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증언한다. 말씀의 육신화, 그것이 信이다. 말의 잘함보다 말의 실행이 중요하다. 약속하면 그것을 지켜야 믿음의 사람이 된다. 말만 잘하면 그것은 유혹할 유(誘)다. 꾈 유(誘)는 말씀 언(言)과 빼어날 수(秀)의 합성이다. 말을 빼어나게 잘하는 것은 꾀는 것이다. 믿음은 ‘말과 그 말의 행함’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약속했다. 후사를 주겠다고. 그리고 이삭을 약속으로 주셨다. 또한, 그 이삭을 바치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사라에게 말했으면, 분명 반대했을 것이다. 가정은 풍지박산이 날 것이 뻔하니,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긴 여정을 떠났다. 예수님이 골고다 길을 가듯이….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서 칼로 내리쳤다. 마지막 찰나에 “멈춰라”고 해서, 멈춘 아브라함이다.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이삭이다. 이삭은 평생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으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준행한 것이다. 그제서야, 하나님은 “너를 믿겠다”고 하셨다. 그 행위로서 믿음이 검증된 것이다. 믿음의 본질은 ‘말과 행위의 일치성’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브라함처럼,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위에서 바침으로 입증된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까지 바치신 그 하나님을 이제는 우리가 믿어야한다. 가장 귀한 것을 바쳤으므로, 그 사랑을 확증한 것이다. 믿음은 ‘말과 행위의 일치성’으로 믿는 것이다.
믿음은 신용(信用)이다. 신용은 쓸만한 믿음이다. 그 믿음의 활용도가 어느정도 되느냐가 신용도이다. 신용등급은 은행이 자주 사용하는 대출한도 계급제도이다. 10등급~8등급은 대출을 하고서 갚지 않은 사람들이다. 갚겠다고 하고 갚지 않으니, 빚이 되어서 신용등급이 떨어진 것이다. 말과 그 행함으로 신용도가 평가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에서 “교육을 한 내용대로 반드시 살아야한다”라고 거듭, 거듭 강조했다. 학교 교육은 이론이지만, 교회 교육은 이론을 초월한 삶이요, 영혼이요, 영원한 운명을 좌우한다. 그래서 신용등급 관리를 철저히 해야한다. 하나님과 나의 약속관계는 어떠한가? 신용등급이 추락했으면 그때는 관계회복을 위해서 십자가를 붙들어야한다. 십자가앞에서 신용불량의 신앙상태를 낱낱이 고백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야한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이다.
믿음의 표준은 예수님이다. 인생이 믿을만한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처럼 하면 된다. 그 분의 놀라운 인격과 혁명적 도전을 어찌 닮을 수 있을까싶지만, 말씀속에 드러난 삶의 족적(足跡)을 따라가다보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마음 깊이 스미게 된다. 예수님의 세족식은 믿음의 표준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다. 예수님은 “인자는 섬기러 왔다”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그리고, 밤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잠자는 제자들의 몫까지 기도하시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발을 씻어주듯, 제자들의 죄까지 대신 짊어지고, 유대인과 로마제국의 죄까지, 후아담에서 첫아담의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죄의 근원은 옛뱀이다. 십자가는 엣뱀이 칭칭 감고 있었다. 그것을 온 몸으로 껴안고 불구덩에 들어간 것이다. 믿음의 표준은 이것이다. 주님은 “인자의 권력은 섬김이다”라고 하시고, 스스로 그것을 실천하셨다. 말과 행위가 일치할 때, 비로소 믿음의 사람이 되고, 믿음의 표준이 된다. 그러므로, 약속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는 것과 같다.
인생은 탄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는 없다. 반면 죽음은 결정할 수 있다. 스스로 목을 메고 죽은 유다, 스스로 말씀에 순복한 예수님, 스스로 거꾸로 메달린 베드로, 스스로 감옥에 갇히는 길을 선택한 바울, 스스로 추방의 길을 선택한 루터 등등 인생의 마침표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 인생은 탄생과 죽음의 중간을 살아간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마침표다. 그 죽음을 물음표로 끝낼 것인가? 말씀의 마침표로 끝낼 것인가? 인생의 선택이다. 예수님은 단 한번 결정할 수 있는 그 죽음을 스스로 결정해서 ‘십자가의 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죽음을 장식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인가? 결국 죽는 인생, 이러한 죽음의 형체는 2천년 역사속에 가장 아름답다. 십자가의 길은 그 무엇으로도 비교될 수가 없다.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약속을 지킨 예수님이시다. 우리를 대신해 약속을 지키신 예수님께 우리도 약속의 사람이 되어야한다. 약속은 평소 약속을 지키는 습관을 가지면서 그 믿음이 점점점 성장하는 것이다. 믿음의 나무는 그 뿌리가 있어서, 평소 약속을 지키는 삶을 살 때 믿음도 점점점 깊어진다. 하나님과 관계도 그렇고, 사람과 관계에서 믿음의 깊이도 동일하다. 사람은 믿을 존재가 못되지만, 사람과 관계는 믿음으로 충분히 연결될 수 있다. 사람과 관계는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믿음이 형성되므로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