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통치 시스템은 지상천국의 천년왕국을 말한다. 내가 30년 있었던 곳에는 ‘중심인물론’과 ‘왕벌비유’와 ‘왕벌조직’이라는 말이 있다. 3가지를 합쳐보면, 단군왕검의 왕권통치와 흡사한 ‘제정일치의 왕권통치’를 의미한다. 꽤 설득력있는 종교정치 시스템처럼 보인다. 중심인물을 통해서 모든 지파가 하나로 합쳐지는 그런 시스템, 강력한 중앙집권통치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신권통치를 하고 싶어하신다.
모세가 살아있는 동안에 모세를 ‘모세 왕’ ‘모세 대통령’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직 여호와를 왕으로 섬겼다. 모세는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권력을 가졌다. 12지파는 각각 지도자가 존재했고, 권력도 각자 넘겨 받았다. 12지파는 대한민국에 있는 8도(道)와는 색채가 다르다. 각 지파의 조상을 왕처럼 섬기면서 똘똘 뭉쳐져 있다. 마치 ‘해병대 전우회’와 같은 끈끈한 결속력을 가진다. 각 지파는 각 지파로 다스려진다.
중앙에는 레위지파가 있는데, 그 레위지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고, 제사를 집행했다. 그런데, 이 레위지파가 훗날 종교권력을 독점한다.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각 지파를 직접 통치하는 것을 원하셨다. 각 지파는 하늘을 올려보면 된다. 왕은 곧 하나님이다. 땅에 왕이 있으면, 사람들은 그 왕을 중심할 것이고, 그러한 통치는 평면에서 중앙집권 통치다. 하나님은 위에서 직접 통치하면서 모든 인간은 서로 평등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왕권통치, 교황통치를 허락한 적이 없다. 모두 사람이 만든 인본적 제도다. 계시록에도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고, 각 사람들은 왕노릇한다고 했다. 왕은 오직 하나님이고, 어린양 예수님이다. 나머지는 평면의 땅에서 평등하다.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은 위치가 서로 같으므로 계급이 존재할 수가 없다. 계급이 존재하면 그 자체가 피라미드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 신앙국가를 원하신 것이다. 하나님 중심 신앙국가는 곧 교회를 뜻한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의미로만 생각한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면서 이미 ‘지상천국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면 이 땅은 하늘에서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입체적 중앙집권 통치 시스템이다. 평면과 전혀 다르다. 평면에서 중앙집권 통치가 일어나면 권력의 서열화가 있는데, 하늘의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면 평면에 있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하나님 안에서 정치권력, 경제권력, 종교권력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한 시스템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임시방편의 권력이고, 영원한 권력은 하나님과 어린양예수님이다.
왕벌비유, 중심인물론은 십자가의 통치가 단상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1사람을 중심해서 지배의 통치를 하면 굴종해야한다. 마치 교황의 권력과 같다. 예수님의 권력은 그렇지 않다. 사람과 사람끼리는 일방통행의 권력을 허락하지 않았다. “섬기는 자가 더 높다”는 인자의 권력은 ‘쌍방향 섬김’을 뜻한다. 짐승의 권력은 일방통행이며, 오직 밑에서 위로 경배하고, 위에서 아래로 지배한다. 반면, 인자의 권력은 서로 섬기고, 서로 다스리는 쌍방향 권력이다. 권력의 중심은 하늘에 있다. 인자의 권력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이 권력의 주인일 때 가능하다. 단상의 십자가는 단상뒤에 있으나, 권력구조로 본다면 교회 꼭대기에 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모든 성도를 내려다본다. 단상의 목사나 장의자의 성도나 성가대의 성가대원이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강도사나 모두 동일하다. 그리스도의 권력은 교회 자체이며, 그 안에서 모두 평등하다. 이것이 신권통치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다윗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했다. 그런데, 다윗왕은 정치와 종교의 왕이 통합된 왕으로서,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 권력은 하나님의 것인데, 자신이 권력의 칼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도망자 신세일 때는 하나님을 붙들었으나,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니 편안한 궁궐에서 유부녀를 유혹하고, 충성자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서 죽게 만들었다. 권력을 이용한 간접살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악하다고 했다. 짐승의 권력이 이렇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다고 해도, 권좌에 앉으면 짐승의 유혹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은 다윗과 극명하게 대립된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를 포함해 12제자를 위해서, 신부된 교회공동체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전쟁터와 같은 골고다에서 희생했다. 다윗과 완전히 다른 권력의 모습이다. 다윗은 성전건축 헌금을 모아서 성전을 짓겠다고 했으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다. 반면,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 신부들을 위해 교회 공동체를 설립했다. 누가 진정 우리의 왕인가? 누가 진정 우리의 신랑인가?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아내를 지키려고 전쟁터에 나간 우리야를 통해서 나타나지, 잔인한 다윗의 탐욕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마태는 “우리야의 아내”라고 기록한 것일까? 우리아가 과연 자신의 죽음을 몰랐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아처럼 아내를 위해 전쟁터로 나가는 것이다. 왕을 위한 충성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한 남자의 과격한 사랑도 이러한데, 하물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도 소년시절에는 순수했다.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그때 공주를 아내로 얻었으나, 훗날 그녀를 찬밥 취급한다. 이것이 권력의 어두운 그늘이다. 예수님은 변함이 없으셨다.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로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님은 골고다에서 피세례로 말씀에 끝까지 복종하고, 그 시대 골리앗같은 ‘옛뱀’을 완전히 소통하고 섬멸했다. 오직 신부된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희생하신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의인이 어디에 있는가? 십자가는 그리하여 가장 빛나는 하늘훈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