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달간 나는 종교개혁했다. 완전히 뒤짚혔다. 배가 뒤짚히면 난파당해서, 어부들은 고기를 뒤짚지 않는다고 하던데, 나는 뒤짚혔다. 엄마 뱃속에 있는 아이는 해산의 때가 되면, 머리와 발이 뒤짚힌다. 뱃속에 있는 그 상태로 나오면 아이는 죽는다. 머리부터 나오려고 아이는 거꾸로 다이빙 자세를 취한다. 그것이 인자의 권력이다. 낮아져야 살 수 있다. 지난 2달간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님은 창조를 2번 하셨다. 1번은 천지창조, 2번은 예수님을 통한 재창조다. 재창조 과정이 계시록에 자세히 나와있다. 이 땅과 사람을 창조했으나, 잘못된 길로 가면서 인생을 허랑방탕하니, 하나님께서 집나간 인류를 찾으로 이 땅까지 내려오신 것이다. 아멘!!
나는 30년 전에 성경공부를 통해 새로운 신앙세계에 들어섰고, 그 당시에는 십자가를 버릴지라도 소중했던 신앙의 가치였다. 그것도 그때는 종교개혁이었다. 그리고 30년이 흘렀고, 나는 많은 풍랑과 사막과 고요와 짐승을 만나 투쟁하듯 싸웠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현빈이 레벨 100이 되어서 천국의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단계가 될 때까지 무한대로 싸우듯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무기력도 벗이 되어 권태롭게 살던 그 어느날, 하나님은 바람처럼 내게 말씀했다.
“똑같은 반복의 노예생활 그만하라”
나는 집-교회-까페를 의무적 고삐에 메어서 끌려다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감동에 힘입어 나의 현실사정을 주님께 토로했다. 내가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하든, 하나님은 이미 들으시고 내게 응답하셨다. 간절함과 진실함이 곧 기도의 이름이 되어 하나님께 상달된다. 애절함과 비통은 특급 등기우편이 되어서 하나님이 직접 수령하고 답을 주신다. 2달전 나의 종교개혁은 그렇게 시작했다.
내 삶은 주어진 수명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 동안에 계속 종교개혁을 할 것이다. 나로부터 출발이다.
“절대믿음”이란 말이 얼마나 무서운 종교권력인지, 그것은 마취약이다. 절대믿음은 대표적 종교 보이스 피싱이다. 믿음의 정의가 왜곡되면서 절대믿음이란 말이 등장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절대믿음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산주의가 실현 불가능한 정치제도이듯 그렇다. 1:1의 사랑 공동체인 부부끼리도 절대믿음은 불가능하다. 절대믿음 자체가 틀려서 그렇다.
절대믿음은 절대우상과 같다. 믿음이 무엇인가. 가령, 교주가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따르는 지도자의 마음이 흔들린다. 교주가 절대믿음을 요구한다. 거짓말을 거짓말로 믿으라는 것인가. 거짓말을 참말로 믿으라는 것인가. 그 사명을 믿으라는 것인가. 절대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이렇게 조금만 따져봐도 절대믿음은 바벨론 황금신상처럼 거짓이다. 사람이 절대 믿음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이 신격화이고, 우상화다. 정치제도는 그러한 우상권력을 완곡하게 표현해 대통령, 황제, 군주라고 한다. 경제권력은 우상권력을 회장, 사장, 이사장, 대표, 총재라고 표현한다. 권력을 칼처럼 휘두르면, 그것이 짐승이다. 반면, 권력의 칼을 가지고 있어도 휘두르지 않고 섬김과 겸손을 다하면 그것이 인자의 권력이다.
믿음은 계약서와 같다. 만약 누군가 자신을 메시야라고 했다면, 그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의 계약관계다. 계약이 사뭇 사무적 단어로 들릴 뿐, 계약이 약속이다. 계약은 “약속을 맺다”는 뜻이다. 약혼은 결혼의 약속이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있다. 서로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면 부부가 된다. 믿음은 이와 같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믿음이 발생하지, 어떤 사람에 대해 절대적 신용도를 부여해서 하나님처럼 믿게하면 그것은 “우상의 절대성”이다. 믿음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믿음에는 각종 종류가 있다. 믿음의 관계도 다양하다. 하루를 살면서 우리는 약속의 땅에서 살아간다. 편의점에서 작은 종이를 내밀면 그 직원은 종이를 믿고 물건을 준다.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발행한 약속의 지폐다. 사람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고, 어기는 사람이 있고, 늦게 지키는 사람이 있다. 언젠가 대출받은 돈을 매월 갚는데, 1달 늦게 꾸준히 갚았다. 은행기록에는 10개월 장기연체로 기록되었다. 1달 늦게 계속 걒았지만 은행은 꾸준히 1달 늦게 갚은 사람으로 나를 평가했다. 믿음의 신용도는 이런 것이다. 10등급 최하등급으로 추락한 적도 있다. 10등급이 나의 인격이 아니다 은행과 나의 신용등급이 그렇다는 것이다 은행이 볼 때 나는 믿을 존재가 못 된다. 그러나, 취재현장에서 나는 믿음직한 기자로 활동한다.
믿음의 조상이란 칭호를 받은 아브라함 역시 아내 사라에게는 믿을 수 없는 남편이었으리라. 늦둥이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는데, 사라가 남편을 믿었겠는가. 아브라함이 얻은 믿음의 칭호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비롯된다. 아내와 신뢰가 우선이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지 않았으리라. 믿음의 이중성은 여기서 발생한다. 믿음은 사람과 관계에서 각각 맺는 것이며, 때론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하나님께 믿음을 지키려는데, 그것이 사람에게는 불신을 줄 수도 있다. 젊은 시절 나는 수요예배를 절대로 지켰다. 회사 사장이 아무리 핍박해도 나는 수요예배에 반드시 참석했다. 수요예배가 하나님께는 믿음을 주지만, 회사 사장에게는 불신을 줬다. 다니엘이 황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믿음을 얻었으나, 황제에게는 불신을 얻었다. 믿음은 이런 것이다. 아무리 믿음이 없는 사기꾼도 자식에게는 약속을 지키는 믿음을 보일 수 있다. 살모사가 맹독을 가졌으나 자식에게는 자기 몸까지 내주는 신뢰를 보이듯 그러하다. 세상이 흠모하는 인품과 덕망을 가진 사람도 가족의 외면을 받을 수도 있다. 평생 모은 재산을 가족과 의논없이 사회에 환원한다면 그러한 아버지를 누가 신뢰하랴 믿음의 본질이 이러함을 알아야, 절대믿음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절대믿음은 실현 불가능한 사상누각이다. 오로지 사람과 관계에서, 하나님과 관계에서 약속 지키기에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사는 것이 아름다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