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천권 넘게 책을 발간했고, 몇백권을 집필했다.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글을 써서 책을 만들었다. 책만 보면, 그냥 즐겁다. 도예가는 도자기를 불에 굽는 그 맛에 인생을 산다. 나는 책만드는 재미로 중년을 보냈다. 오늘도, 지금도, 책을 2권 만들어서 교보문고에 납품했다. 내일 즈음 네이버에 검색될 것이다. ‘왕이 된 남자’ 드라마를 보기까지 2권 남짓 책을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도 곧 책이 될 것이다.)
까페 직원이 아메리카노를 만들 듯, 나는 그냥 책만드는 그 낙으로 살아간다. 내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았으면, 나는 배추와 상추와 배와 키위를 보는 낙으로 살았을 것이다. 책을 밭삼아, 논삼아, 나는 노트북의 논두렁을 날마다 다니면서 글을 쓰고, 생각을 풀어놓고, 들판에 서서 지평선을 바라보며, 하루를 돌아보고, 10년을 돌아보고, 미래의 10년을 내다본다. 나는 책과 결혼했다.
나는 무조건 책이다. 책은 논문 위에 있다. 책의 공신력은 ‘공증’과 같다. 어떤 책은 말이 허황된 이야기로 가득차 있으나, 그것도 책이다. 책은 책이다. 그래서 나는 책에 도전했고, 그렇게 살다보니 글쓰는 필력을 얻었고, 손가락의 무릎이 꺽이지 않는 이상, 나는 글을 쓰고 전자책을 만들 것이다. 전자책은 종이책과 달라서 영원하다. 내가 죽게 되면,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출판사를 상속해서, 평생 집필할 수만권의 책을 물려주리라. 나의 소박한 꿈이다. 나는 10만권의 책을 출간할 생각이다.
책쓰는 가장 좋은 비법은 일기쓰듯 쓰는 것이다.
책은 그때 그때 엮어서 출간하는 것이 가장 탁월하다. 묵히면, 안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책을 집필할 때, 작가와 책은 각각 분리되어 있다. 가령, 어떤 작가가 책을 쓰기 위해서 오랫동안 원고를 잡고 있는데, 그러한 책도 중요하지만, 때론 역발상으로 책을 쓰는 것도 필요하다. 나의 경우가 그렇다. 글을 계속 써서, 그것을 책으로 만들고, 그렇게 계속 출간하면서 글을 모으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니, 100권, 300권, 1천권, 5천권을 넘어섰다. 그 책속에는 별의별 책들이 많다. 만화책도 있다.
책을 쓰기 위해서 붓을 들 때, ‘글’을 써서 책으로 묶는 것이다. 책은 글의 묶음이다. 책을 쓴다는 것은 결국 글을 쓰는 것이다. 이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오늘 글을 썼으면, 그것은 완결해야한다. 내일 그 글을 다시 읽으면 안된다. 내일 읽으면 글이 다시 달라진다. 달라진 생각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은 글을 붙잡고 거기 묶이면 글의 발전이 없다.
글은 칼럼으로 완성했으면, 그것으로 끝내야한다. 새로운 칼럼을 써서 계속 모으면, 그것이 책이 된다. 글은 완성해서 모으고, 새로운 글을 계속 써야지, 이미 썼던 글을 다시 교정하려고 하면 안된다. 그렇게 한권의 책을 완성한 다음에 그때 전체적으로 교정해도 늦지 않다. 책을 쓰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살면서, 나를 통해서 작가가 된 사람들이 많다. 내가 처음에 그런 은혜를 입었으므로, 나는 많은 사람을 작가로 등단시켰다. 대부분 글을 쓰면서, 그 글을 엮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글과 책은 같다. 그런데, 글이 책이 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채, 시간만 보내고 있다. 글이 곧 책이다. 책은 논문과는 완전히 다르다. 논문은 증명을 위해 고정된 틀이 있다면, 책은 스스로 순서를 정한 다음에 글을 엮어서 출간하면 된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명예훼손에 걸릴 위험을 배제하고, 정의로운 비판을 할 양심을 겸비하면서, 표현의 자유로 외치는 것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해당할 것이다. 2천년전은 광야가 들판이지만, 지금은 4차 혁명의 시대로서, 홍수가 범람하듯 거짓의 비진리가 풍랑처럼 일어나는 혼돈과 무질서의 시대다. 예수님은 “파도야 잔잔하라”고 했다. 진리로서 외쳐야 세상의 혼돈이 멈출 것이다. 누군가, 외칠 자는 글과 책으로 외쳐야한다.
요나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도망치다가, 결국 자신이 원하지 않는 혼돈의 바다에 심청이처럼 희생양이 되었다. 그 버려짐으로, 바다는 잔잔해졌다. 정보혁명의 시대에 진리를 외친다는 것은 비판의 풍랑을 감수해야한다. 책임의 바다에 버려질 각오를 해야한다. 그래서 나는 30년동안 꾸준히 소신껏 신앙칼럼을 썼고, 지금은 옛날 교회의 비판을 감수하면서 소신있는 칼럼을 쓴다. 결국, 인생은 하나님을 향해 계몽해야할 운명 공동체이므로.
말은 휘발성이 강해서 금방 사라지고, 동영상은 묵직해서 보기가 불편하고, 결국 ‘텍스트’로 귀환이다. 책은 부담이 없다. 책장에 꽂힌 나의 책들은 손에 잡힌다. 그렇듯 마태가 쓴 책, 마태복음이 2천년동안 애독서가 되었다. 요한이 쓴 요한복음이 그러하고, 마가복음의 서툰 글 모음집이 복음서 발간에 촉매제가 되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사도들과 바울과 예수님을 성령으로 연결하는 위대한 필독서가 되었다.
루터가 격분해서, 교황의 면죄부 판매사건을 성토하려고, 독일시민들을 모아놓고서 “위대한 선언”을 했다면, 종교개혁의 불씨가 일어났을까? 오로지, 95개조 반박문이 출판되면서,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고, 타당하고 합리적인 질문으로 인식되면서 종교개혁의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책이 이렇게 중요하다. 전자책이 좋은 것은 영원성에 있고, 내가 쓴 전자책중에서 좋은 책은 선별해서 종이책 몇권을 제작해서 내가 읽으면서 스스로 감명을 받는다. 이 또한 특별한 감동이 밀려온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 단순한 진리에서 ‘책’이 사람을 만들려면, 누군가 ‘책’을 만들어야한다는 것, 그리하여 책은 곧 사람을 개혁하는 능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