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나는 성경을 들여다보았다. 돛단배처럼 슝슝 그렇게 성경을 읽다가, “정박하고, 돛을 내리라”고 해서, 읽다가 가만히 그곳을 집중해서 읽는 습관을 가졌더니, 놀랍게도 드라마를 보는 듯, 파도가 밀려오는데, 아!! 감동도 끝이 없다. 걱정과 근심이 나를 엄습할 때는 두려움이 암흑같았다면, 성경말씀을 깊게 묵상하므로, 암흑은 저 밑으로 내려가고 내게는 주님의 우물이 샘솟는다. 참 신비한 일이다.
[창세기 1:1]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요한복음 4: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님은 감동이 마르지 않는 영원한 드라마다.
마태는 주님을 ‘모세’와 비유해서 증거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바톤을 건네받고, 바로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그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서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여호수아와는 비교될 수가 없다. 예수님은 “성전이 돌위에 돌하나도 남지 않으리라”는 선전포고를 했다. 여리고성도 찬양과 말로서 무너졌으니, 예루살렘의 함락 또는 종교권력의 몰락은 눈앞에 다가왔다. 그런데, 예수님이 체포됐고, 함락됐다. 그것도 적국에 잡혀서 나무에 메달렸다. 아!! 이 비극이여!! 여리고는 무너지지 않고 예수님이 무너지다니요? 제자들은 그래서 떠났고, 도망쳤고, 제사장들은 찬송을 불렀다.
무엇이 무너졌을까?
권력이든, 백성이든, 모두 유한성의 한계에서 살아간다. 권력자는 5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인생은 100년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경제의 여리고성을 가진 자들도 언제 무너질까, 두려움에 쌓여서 살아간다. 집을 가진 자는 빚의 공포에 시달리고, 사랑을 얻은 자는 그 사랑을 잃을까 노심초사다. 로마는 식민지의 반란 때문에, 식민지는 로마의 폭압 때문에, 백성은 빈곤 때문에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공포에 숨죽이며 살고 있다. 모든 사람의 여리고성은 바로 ‘죽음’이다. 두려움과 공포의 죽음은 반드시 무너져야한다. 그러나, 언젠가 건너야할 그 성벽이여!! 그 죽음의 벽이 무너졌던 것이다. 여리고 성벽에 ‘붉은 줄’을 메달면 구원의 생명줄이 되리라는 약속처럼, 보이지 않는 죽음의 공포속에 ‘십자가의 줄’에 연결되어서 여리고성을 없앴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는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 사망의 여리고성이 무너졌던 것이다.
[여호수아서 2:21]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오늘은 하늘을 보니, 십자가가 연상됐다. 아!! 내가 돌아갈 그 본향의 천국문, 무너진 여리고 성벽에 메달린 십자가 창문으로 다가왔다. 구원의 밧줄, 십자가의 붉은 생명줄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