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바다는 구약과 신약이 밀물과 썰물처럼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짝’의 개념으로 설명하기엔 그 깊이와 넓이와 절묘함이 숨막힐 지경이다. 문학작품은 그 작품안에서만 비유가 통한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과 현실세계와 인류문명까지 비유로 해석된다. 창세기 사건이 성경 곳곳에서 심해처럼 펼쳐지는데, 그 파노라마는 오직 ‘성경을 보는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 성경을 보는 방법은 바로 ‘진리의 성령’을 통해서이고, 그 진리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값없이 선물로 주신 은혜다. 아멘!! 저작권없이 진리의 성령을 주시므로, 얼마나 감사한지…. 진리의 성령은 다른 말로 예수님의 성경해석법을 말한다. 예수님의 성경해석법은 말씀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것’의 의미를 알기까지, 나는 1달 남짓 걸렸다. 정말로 어려운 개념인데, 깨닫고 보니 허상이 사라지고 본질이 드러났다. 마치, 기존에는 십자가가 보였다면, ‘말씀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방법’을 배우고, 진리의 성령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니, 무너진 여리고성에 메달린 십자가로도 보였다. ‘사망의 벽’을 허물어뜨리고, 구원의 창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성경으로 성경을 논증할 때는 반드시 ‘성경속에서’의 규칙을 지켜야한다. 축구는 축구안에서 축구를 해야하고, 바둑은 바둑안에서 해야한다. 법은 법안에서 법률해석을 해야한다. 이것과 같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중앙선은 ‘성경말씀’이다. 성경말씀으로 성경말씀을 논증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과 같다. 축구선수가 공을 손으로 잡으면 반칙이듯, 선악과를 만지거나 따먹는 것이 반칙이다. 그처럼 성경말씀을 벗어나서 진리를 주장하면 그것이 반칙에 해당된다. 반칙은 비진리다. 세종대왕은 우리에게 한글을 물려줬다. 자음과 모음이다. 세종대왕이 만든 자음과 모음보다 더 멋있고, 간편한 기호를 만들 수도 있다. 가령 +의 기호는 없다. +을 모음으로 새롭게 정의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할 수도 있으나, 무익하다. 왜냐면 이미 정해진 자음과 모음을 벗어나서 그렇다. 그처럼 성경말씀은 이미 확정된 진리다. 진리는 성경말씀 안에서만 논해야한다. 성경의 사건을 설명함에 있어서, 오직 2가지를 명심해야한다. 하나는 그리스도 사역,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그 일을 하신 예수님은 누구인가? 2가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다. 구청장 후보 선거캠프만 가더라도, 후보가 지역민생을 위해서 무엇을 했고, 후보의 이름과 기호를 끝까지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홍보하고, 사랑하고, 증거하는 사역자이다. 무슨 일을 해도,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역을 높게 절묘하게 홍보해야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야한다. 이것이 빠지면, 성경도 인문학으로 흐른다. 인문학이 되면 성경에는 구원이 사라진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는 근본 이유는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기 위함이다. 성경은 구원이 핵심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이 중심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다.
베드로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부활사건 후, 153마리 물고기를 베드로가 잡았다.
그리고, 회심하고 베드로가 3천명 군중 설교로 전도했다.
[마태복음 4:19]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태복음 21: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사도행전 2:40]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났을 때 “깊게 그물을 던져라”는 말씀에 의지해서 그렇게 했다. 부활사건 이후에 회심하고 디베랴호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깊게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 물고기를 잡았다. 아멘!!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 말씀에 의지해서 축복의 물고기를 잡기를 항상 바란다. 모두 그리 되길 축복한다.
베드로는 무슨 능력으로 3000명을 회심시켰을까?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아멘!! 베드로는 십자가 사건 ‘전과 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십자가 사건 전에는 십자가를 반대했다. 죽음을 앞두고, 살아야할 가족이 생각났을 것이고, 다양한 이유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사건 후에는 십자가를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인 자들을 정면승부했다. 그런 담대함이 어디서 온 것일까?
[마태복음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요나 1:12]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요나는 바다에 던져짐으로 바다가 잔잔해졌다. 예수님은 골고다의 바다에 스스로 뛰어 들어가셨다. 십자가의 창살을 등에 짊어지고서 그 깊은 암흑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요나는 고래 뱃속에 있었다면, 예수님은 고래를 잡으러 내려가신 것이다. 공포의 상어를 포획하러 가졌던 것이다. 제자들이 ‘복음의 그물’을 버려두고 도망갔어도, 겟세마네 기도의 동산에서 주님은 깊은 심호흡을 하시고, 그렇게 바다에 뛰어들 준비를 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홀로 바다속에 들어가셨다. 깊은 암흑속에 있던 공포와 두려움의 상어를 잡으신 것이다. 깊은 암흑의 공포까지 작살로 잡으셨다. 주님이 두려움속으로 들어가시므로, 베드로는 도망쳤던 곳에서 돌아오게 되었다. 서로 묶인 공동운명체처럼, 그가 내려감으로 베드로는 올려진 것이다.
또한, 십자가는 물고기떼를 잡은 위치다. 베드로는 그 십자가의 위치로 그물을 던지므로, 예수님이 잡았던 물고기를 끌어서 왔던 것이다. 십자가로 잡은 고래는 바로 지구고래다. 믿는 자마다 십자가를 향해 그물을 던지기만 하면 이미 잡힌 고기를 끌어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세상은 노인과 바다처럼 스스로 고래를 잡는 것이면, 믿는 자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능력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창살로 대신 잡으시고, 우리는 가지고 오는 것이다. 십자가의 닻을 올리고, 십자가의 돛을 올리고, 십자가의 키를 잡고서 그렇게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혼자서 하면 붕어 낚시, 십자가를 믿음으로 하면, 주님이 대신 잡아주신 고래도 상어도 얻는다. 십자가 창살로서!!
주님은 죽지 않으셨다. 달리다쿰!! 잔다고 했다. 주님은 십자가를 등에 메고 깊은 바다속에 내려가셔서 아직 올라오지 않으신 것이다. 우리는 기도의 뱃머리에서 고래처럼 다시 올라오실 주님을 기다려야한다. 부활의 주님은 반드시 고래처럼 솟아오른다. 우리 주님 심해에 계시는데, 올라오실 때까지,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는 부활의 때를 소망해야한다. 십자가 창살 등에 메고 바다 깊은 곳으로 주님따라 자원해서 들어가야한다. 이것이 현대사회에 새롭게 요청되는 복음의 순교사역이다. 꼭 죽어야 순교가 아니다. 죽을 각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수하는 것도 순교다.
오 주여!!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이 어둠의 공포를 십자가 창살로 잡아주소서.
오 주여!! 내 마음의 혼돈에서 주님 십자가가 영원한 닻으로 내리소서,
오 주여!! 내 인생의 방향에서 주님이 승리의 돛이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