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디베랴 호수를 좋아한다. 슈퍼맨처럼 부활했다고 믿은 예수가 마술처럼 사라지면서, 절대믿음이 실종당한 베드로, 요한, 안드레, 야고보 등등 갈릴리 청년회는 난파당한 고깃배처럼 고향으로 가야했다. 금의환향(錦衣還鄕)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 이후 일이다. 40일간 활동하신 예수님의 행적은 사실상 제자들의 말뿐이다. 그리고, 디베랴에서 기적적인 조찬모임이 있었다. 나는 이 사건을 읽으면, 가슴이 애잔하다.
부활의 주님이라고 표현됐지만, ‘육체가 아닌 영체’로서 격리된 주님이시니, 만지면 만져져도 이질적 존재체로서 예수님이다. 주님인 것을 알아본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격의 사랑이다. 선거캠프에 한번 잘못 휩쓸려 고배(苦杯)를 마신 킹메이커로서 베드로가 책임이 가장 컸으리라. 위대한 왕의 등극이 이뤄질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으므로, 그 참담함은 견딜 수가 없었으리라. 인생은 쓰고(苦) 바다는 짜다.
기계는 낡고, 사람은 늙고, 정신은 녹슨다. 돈, 권력, 지식, 예술, 명예 등등 세상의 것들을 접하면, 정신은 서서히 물들어간다. 어쩔 수가 없다. 정신이 물들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근신하고, 견책함이 마땅하다. 누가 자신의 구원에 장담하리요!! 나의 신앙은 20년전에 다시 시작했다. 사람들은 제도와 율례로서 믿음과 은혜와 구원의 깊이를 논하겠으나, 그것은 인간의 척도일 뿐이다. 하나님앞에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이다.
“나로부터 출발”이란 단어가 내 신앙의 반석이다. 지난 세월 거슬러 올라가면, 내 신앙이 부실하지 않게 설계된 것에 심히 감사드린다. 비록 절음발이로 살아가야할 운명에 처했으나, 불행은 있는 사실을 받아드리지 않음에 있다. 장애(障碍)는 장애를 인정하지 않는 그 인식이다. 장애인의 신체적 결함보다 장애를 장애로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의 장애가 더 고통스럽다. 장애는 장애일 뿐이다. 없는 불편함일 뿐이다. 모두 가진 부유한 자도 없는 것이 있다. 누구나 아픈 고통이 장애로 작용한다. 그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때 행복이 밀려온다. 바꿀 수 없다면 받아드리라. 십자가도 그러했다. 받아드려야할 시대적 운명이었다.
제자들은 신랑을 잃은 그 슬픔을 십자가로 딛고 일어선 패잔병이었으나, AD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로마의 카타콤(지하무덤)으로 들어가면서, 더 참혹한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듯 하였으나, 하루가 100년으로 환산해서, AD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를 통해 기독교가 지상으로 벗어나게 되었으니, 신은 있다. 야훼의 이름은 “있다, 있게 하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있게 하시는 여호와께서 없는 그 장애를 있게 하심이다.
인생, 참 고단하다. 내 인생의 고향, 디베랴 호수는 어디일까?
[요한복음 21장]
1.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