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는 재미, 창조적 상상력은 ‘예수님의 사역’을 기준해서 구약의 모든 사건을 비교분석하면서 연구할 때 신비한 ‘영적 열림 현상’을 경험한다. 이러한 영적 깨달음은 기도함으로 위에서 깨달아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위에서 내려오는 영적 계시도 무시할 수는 없다. 다니엘은 환상을 봤고, 요셉은 꿈을 꿨고, 에스겔 선지자도 환상의 계시를 받았다.
예수님도 선지자로서 영적 환상 뿐만 아니라, 마귀와 귀신을 상대해서 물리치는 영적 능력도 가졌다. 위에서 내려오는 영적 계시보다, 성경속에서 올라오는 깨달음의 계시가 더욱 신비롭다. 성경속에서 발견하는 깨달음은 말씀에 기초하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다. 뿌리깊은 나무와 같다. 그래서 신앙인은 성경을 깊게 묵상해야한다.
성경의 교훈은 현실에 적용되어야한다. ‘무지속의 상극세계’는 솔직히 이론적 공산주의같다. 현실에서 적용하려면 잘 맞지 않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한 이론이 ‘무지속의 상극세계’이다. 왜냐면, 설정이 모호해서 그렇다. 느고왕은 사명자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런데, 요시야는 종교개혁자이고 율법을 발견한 자이다. 결국, 누구나 느고가 될 수 있고, 요시야가 될 수 있다. 구분이 모호하다. 느고가 진정 하늘의 사명을 받았는지, 아닌지, 그것을 무엇으로 확인하는가? 해당 과목에서 느고는 군사의 강대국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경제 강대국, 경제의 사명자에게 도움을 받아야하는데, 보이스 피싱의 위험이 너무 많다. 과연, 경제의 사명자에게 도움을 받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일까? 예수님도 정치의 권력을 통해서 도움을 받고, 십자가 사건을 잘 피했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이런 상황까지 고려해봐야한다. 무지속의 상극세계는 맹점도 많고, 허점도 많다. 단지, 누군가 자신의 사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논리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마치 공식같다. 그러나, 각 인물마다 바꿔서 설명해도 맞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만큼 무지속의 상극세계 도표는 완벽한 성경공식이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교황의 면죄부 사건’이 갈그미스라고 하면, 1차 사명자(느고)는 루터이고, 2차 사명자(바벨론)는 캘빈이다. 요시야는 교황이다. 그런데, 루터와 캘빈은 교황청 종교개혁은 하지 못했고, 유럽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서 로마 교황청 내부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보여지는 큰 틀과 현실은 이렇게 다르다. 현실가운데 해당 도표를 직접 적용할 경우에,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을 당할 수 있으므로, ‘성경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론’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이 좋다. 무지속의 상극세계, 그 공식대로 인생을 살다가는 속기 십상이므로.
요시야는 변장해서 싸우다가 죽었다.
예수님은 희생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
요시야는 샛별로 불렸다.
예수님도 새벽별이다.
요시야는 종교 개혁가이다.
예수님도 종교 개혁가이다.
요시야는 다윗의 후손이다.
예수님도 다윗의 후손이다.
요시야의 죽음 이후 바벨론 포로가 결정된다.
예수님은 죽음 이후 종교 박해가 시작된다.
요시야는 갑자기 죽었다.
예수님도 갑자기 죽었다.
요시야의 죽음을 선지자가 슬퍼했다.
예수님의 죽음을 제자들이 슬퍼했다.
요시야와 예수님은 닮은 구석이 많다. 결국, 요시야의 죽음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뭔가 연결된 깊은 묵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