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종교개혁!!
성경이 성경을 풀 때는 반드시 대입법을 잘 써야한다. 가령, 느고왕이 하나님의 사명을 말하니, ‘사명자’라고 해서, ‘그리스도’로 직접 대입하면 오류가 많다. 사건의 전체 맥락을 잘 비교하면, 각각 배역들이 분명하게 보이면서 인물의 배치가 들어오게 된다. 단편적인 말만을 가지고 인물을 직접 대입하면 안된다. 이러한 성경해석은 위험하며,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앞서 말했지만, 요시야는 반드시 예수님 입장이다. 이것은 변경될 수 없는 절대원칙이다. 대전제와 같다. 이것을 변경하면, 종교개혁 자체를 부정하고, 예수님의 복음사역까지 왜곡시키게 된다. 요시야가 죽었고, 예수님도 죽었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의 사명자였고, 예수님도 종교개혁의 사명자였다. 요시야는 다윗의 길을 준행하는 왕족이고, 예수님도 다윗의 예언으로 오신 왕족이다. 느고는 이집트에서 갑자기 등장한 침략자다. 이것이 전체적 흐름이다.
요시야는
* 8세에 왕이 됐다.
* 20세에 바알과 아세라 목상의 모든 우상을 제거했다.
* 26세에 성전건축을 실시했다.
* 26세에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통회자복했다.
* 26세에 하나님의 심판을 깨달았다.
* 26세에 유월절을 지키기 시작했다.
* 39세에 느고와 전투에서 전사했다.
여호와의 징벌은 이미 예정된 것이다. 죄가 관영하니, 그 심판은 임박했다. 그때 갑자기 등장한 요시야가 우상을 타파하고, 성전을 재건축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심을 다했으나, 징벌은 피할 수 없었다. 느고왕이 올라온 것은 무엇일까? 이것을 사람들이 너무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말에서 헤깔리니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느고왕,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에게도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계획과 프로그램이 있으면 각각 사역자를 들어서 사용하신다. 느고왕도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을 위해서 군대를 움직인 것이다. 바벨론과 같다.
느고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왔으나, 이스라엘을 축복하려고 온 것은 아니다. 느고를 믿었으면, 싸우지 않았으면, 바벨론 포로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성경학자도 있다. 맞다. 그럴 수도 있다. 단지, 그것은 가설이다. 바벨론이나, 이집트나, 결국 포로생활은 같다. 하나님의 백성앞에,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결국 권력은 같다. 하나는 짐승의 권력, 다른 하나는 정치의 권력이다. 정치권력은 눈에 보이는 용이요, 돈의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용이다.
요시야의 행함과 예수님의 행함, 즉 요시야의 업적과 예수님의 업적을 비교하면, 비교가 안된다. 요시야가 훨씬 크다. 예수님은 우상을 멸한 적이 없다. 요시야는 왕이 된 후, 20세부터 이스라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바알과 아세라 제단을 없앴다. 게다가 성전건축을 했다. 예수님은 성전청소를 한 것이 전부다. 성전건축과 성전청소!! 비교자체가 안된다. 요시야의 업적이 예수님의 업적보다 수만배 월등하다. 그런데, 요시야는 그 징벌의 심판을 막지 못했다. 율법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요시야는 30년, 예수님은 3년했다. 시간적 차이로도 비교가 안된다.
‘심판의 날’이 왔을 때, 요시야와 예수님의 행함이 상당히 비슷하면서 비교된다. 요시야는 싸우다가 죽었고, 예수님은 순종하면서 죽었다. 차이는 여기에 있고, ‘죽음의 모면’을 놓고서는 모두 같다.
[역대하 35: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마가복음 14: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체포됐다. 그것은 누구의 죄때문인가? 그가 체포됨으로 누가 풀려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