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으로 돌아가자. 요시야는 병졸(兵卒)로 변장해서 죽었고, 예수님은 죄인으로 변장해서 죽었다. 왕인 요시야는 백성이 되었고, 의인인 예수님은 죄인이 되었다. 모두 죽임을 당했다. 요시야는 순교다. 요시야가 순교당한 것으로 봐야지, 그것을 부정하면 성경의 깊은 맥락을 어긋나게 한다. ‘요시야는 개죽음이다’라고 만약 성경해석을 하면 그것은 너무 위험하다. 종교개혁을 하고, 성전건축을 하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촉구한 왕에게 가혹한 평가의 형벌을 내려서는 안된다. 만약 ‘요시야는 개죽음이다’라고 평가하면, 그 누가 우상타파를 하고, 종교개혁을 하겠는가. 잘함과 못함은 구분해서 평가하는 것이 공의(公義)다.
요시야와 예수님이 다른 것은 무엇인가. ‘부활’이다. 요시야는 죽고 그것으로 끝났다. 반면, 예수님은 죽고 부활했다. 무덤에 묻힌 것은 요시야가 더 화려했고, 예수님은 자신이 묻힐 무덤조차 없었다. 참 슬프게 가난하게 사셨던 청년이었다. 그분의 삶, 닮고싶다. 흠모할만한 것이 없게 초라하게 가신 예수님의 그 삶이 내 흠모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버려진 그 분의 삶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그 모든 아름다움은 졸(卒)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아나 왕(王)이 되셔서 그렇다. 죽음이 슬프지만 기쁜 것은 부활(復活)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간과하는 것중에 하나가 부활(復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이 맞다. 그러나, 다시 사신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가? 지금 땅에 현존하는가? 쉽게 말해서, 비행기타고 가서 알현할 수 있는가? 교황은 문재인 대통령이 알현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이 만났다. 김정은도 문재인 대통령이 만났다. 예수님도 그렇게 만날 수 있는 분인가? 부활후 40일 동안 잠시 출현하시고 사라지셨다. 지금까지 함흥차사 감감 무소식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부활했다고 확신할까? 바로 제자들 때문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외쳐서 그렇다. 이것이 요시야와 예수님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