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는 재미, 창조적 상상력은 ‘예수님의 사역’을 기준해서 구약의 모든 사건을 비교분석하면서 연구할 때 신비한 ‘영적 열림 현상’을 경험한다. 이러한 영적 깨달음은 기도함으로 위에서 깨달아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위에서 내려오는 영적 계시도 무시할 수는 없다. 다니엘은 환상을 봤고, 요셉은 꿈을 꿨고, 에스겔 선지자도 환상의 계시를 받았다.
예수님도 선지자로서 영적 환상 뿐만 아니라, 마귀와 귀신을 상대해서 물리치는 영적 능력도 가졌다. 위에서 내려오는 영적 계시보다, 성경속에서 올라오는 깨달음의 계시가 더욱 신비롭다. 성경속에서 발견하는 깨달음은 말씀에 기초하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다. 뿌리깊은 나무와 같다. 그래서 신앙인은 성경을 깊게 묵상해야한다.
성경의 교훈은 현실에 적용되어야한다. ‘무지속의 상극세계’는 솔직히 이론적 공산주의같다. 현실에서 적용하려면 잘 맞지 않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한 이론이 ‘무지속의 상극세계’이다. 왜냐면, 설정이 모호해서 그렇다. 느고왕은 사명자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런데, 요시야는 종교개혁자이고 율법을 발견한 자이다. 결국, 누구나 느고가 될 수 있고, 요시야가 될 수 있다. 구분이 모호하다. 느고가 진정 하늘의 사명을 받았는지, 아닌지, 그것을 무엇으로 확인하는가? 해당 과목에서 느고는 군사의 강대국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경제 강대국, 경제의 사명자에게 도움을 받아야하는데, 보이스 피싱의 위험이 너무 많다. 과연, 경제의 사명자에게 도움을 받아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일까? 예수님도 정치의 권력을 통해서 도움을 받고, 십자가 사건을 잘 피했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이런 상황까지 고려해봐야한다. 무지속의 상극세계는 맹점도 많고, 허점도 많다. 단지, 누군가 자신의 사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논리적인 것으로 보여진다. 마치 공식같다. 그러나, 각 인물마다 바꿔서 설명해도 맞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만큼 무지속의 상극세계 도표는 완벽한 성경공식이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교황의 면죄부 사건’이 갈그미스라고 하면, 1차 사명자(느고)는 루터이고, 2차 사명자(바벨론)는 캘빈이다. 요시야는 교황이다. 그런데, 루터와 캘빈은 교황청 종교개혁은 하지 못했고, 유럽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서 로마 교황청 내부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보여지는 큰 틀과 현실은 이렇게 다르다. 현실가운데 해당 도표를 직접 적용할 경우에, 상당히 곤혹스러운 일을 당할 수 있으므로, ‘성경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론’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이 좋다. 무지속의 상극세계, 그 공식대로 인생을 살다가는 속기 십상이므로.
요시야는 변장해서 싸우다가 죽었다.
예수님은 희생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
요시야는 샛별로 불렸다.
예수님도 새벽별이다.
요시야는 종교 개혁가이다.
예수님도 종교 개혁가이다.
요시야는 다윗의 후손이다.
예수님도 다윗의 후손이다.
요시야의 죽음 이후 바벨론 포로가 결정된다.
예수님은 죽음 이후 종교 박해가 시작된다.
요시야는 갑자기 죽었다.
예수님도 갑자기 죽었다.
요시야의 죽음을 선지자가 슬퍼했다.
예수님의 죽음을 제자들이 슬퍼했다.
요시야와 예수님은 닮은 구석이 많다. 결국, 요시야의 죽음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뭔가 연결된 깊은 묵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진정한 종교개혁!!
성경이 성경을 풀 때는 반드시 대입법을 잘 써야한다. 가령, 느고왕이 하나님의 사명을 말하니, ‘사명자’라고 해서, ‘그리스도’로 직접 대입하면 오류가 많다. 사건의 전체 맥락을 잘 비교하면, 각각 배역들이 분명하게 보이면서 인물의 배치가 들어오게 된다. 단편적인 말만을 가지고 인물을 직접 대입하면 안된다. 이러한 성경해석은 위험하며,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앞서 말했지만, 요시야는 반드시 예수님 입장이다. 이것은 변경될 수 없는 절대원칙이다. 대전제와 같다. 이것을 변경하면, 종교개혁 자체를 부정하고, 예수님의 복음사역까지 왜곡시키게 된다. 요시야가 죽었고, 예수님도 죽었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의 사명자였고, 예수님도 종교개혁의 사명자였다. 요시야는 다윗의 길을 준행하는 왕족이고, 예수님도 다윗의 예언으로 오신 왕족이다. 느고는 이집트에서 갑자기 등장한 침략자다. 이것이 전체적 흐름이다.
요시야는
* 8세에 왕이 됐다.
* 20세에 바알과 아세라 목상의 모든 우상을 제거했다.
* 26세에 성전건축을 실시했다.
* 26세에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통회자복했다.
* 26세에 하나님의 심판을 깨달았다.
* 26세에 유월절을 지키기 시작했다.
* 39세에 느고와 전투에서 전사했다.
여호와의 징벌은 이미 예정된 것이다. 죄가 관영하니, 그 심판은 임박했다. 그때 갑자기 등장한 요시야가 우상을 타파하고, 성전을 재건축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심을 다했으나, 징벌은 피할 수 없었다. 느고왕이 올라온 것은 무엇일까? 이것을 사람들이 너무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말에서 헤깔리니 그런 것이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느고왕, 바벨론 느부갓네살왕에게도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계획과 프로그램이 있으면 각각 사역자를 들어서 사용하신다. 느고왕도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을 위해서 군대를 움직인 것이다. 바벨론과 같다.
느고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왔으나, 이스라엘을 축복하려고 온 것은 아니다. 느고를 믿었으면, 싸우지 않았으면, 바벨론 포로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성경학자도 있다. 맞다. 그럴 수도 있다. 단지, 그것은 가설이다. 바벨론이나, 이집트나, 결국 포로생활은 같다. 하나님의 백성앞에,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결국 권력은 같다. 하나는 짐승의 권력, 다른 하나는 정치의 권력이다. 짐승의 권력이 정치권력은 눈에 보이는 용이요, 돈의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용이다.
요시야의 행함과 예수님의 행함, 즉 요시야의 업적과 예수님의 업적을 비교하면, 비교가 안된다. 요시야가 훨씬 크다. 예수님은 우상을 멸한 적이 없다. 요시야는 왕이 된 후, 20세부터 이스라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바알과 아세라 제단을 없앴다. 게다가 성전건축을 했다. 예수님은 성전청소를 한 것이 전부다. 성전건축과 성전청소!! 비교자체가 안된다. 요시야의 업적이 예수님의 업적보다 수만배 월등하다. 그런데, 요시야는 그 징벌의 심판을 막지 못했다. 율법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요시야는 30년, 예수님은 3년했다. 시간적 차이로도 비교가 안된다.
‘심판의 날’이 왔을 때, 요시야와 예수님의 행함이 상당히 비슷하면서 비교된다. 요시야는 싸우다가 죽었고, 예수님은 순종하면서 죽었다. 차이는 여기에 있고, ‘죽음의 모면’을 놓고서는 모두 같다.
[역대하 35: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마가복음 14: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체포됐다. 그것은 누구의 죄때문인가? 그가 체포됨으로 누가 풀려났는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성경밖의 것을 가지고 성경의 질서를 헝클어서 재조립하게 되면, 본질이 희석된다. 맞는 것 같지만, 맞지 않다. 성경은 구약이 문제집, 신약이 풀이집이다. 신약이 곧 답안지이고, 정답이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이다. 구약의 모든 문장의 마침표는 예수님이다. 문장에서 마침표는 맨 끝에 위치하고, 가장 밑에 있다. 그처럼 예수님은 높은 하늘에서 낮은 땅으로 내려오시고, 가장 낮은 백성의 신분에서 죄인의 자리까지 낮아지시고, 가장 처참한 십자가에서 종국의 마침표가 되셨다. 그래서 그는 알파와 오메가로서 사셨다. 졸(卒)은 마칠 졸(卒) 병사 졸(卒)이다. 무기 없이 군복만 받은 병사를 일컬어 졸(卒)이라고 했다. 졸(卒)은 왕을 위해 대신 죽는 희생양이다. 예수님은 졸(卒)로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다. 그래서, 구약의 최종적 마침표가 되신 것이다. 마쳤으므로, 다시 시작의 문이 열린다. 그 세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인 것이다. 율법에 따라 판단받음으로 율법의 마침표로서 끝냈으니, 새로운 은혜와 진리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성경을 분석하고 연구할 때는 ‘예수님=정답’이라는 기준점을 설정하고서 봐야한다. 이것이 어긋나면, 주춧돌이 흔들려서 신앙의 건물 자체가 붕괴된다. 절대원칙이다. ‘예수님=정답’의 설정으로 성경을 깊게 묵상한 이후에, 그 깨달음과 교훈에 근거해서 자신의 삶을 다시 들여다봐야한다. 자신의 삶을 기준해서 성경을 대비하고 비유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기준은 성경이며,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이다.
위에서 분석한 내용(요시야와 예수님)은 예수님을 기준해서, 요시야의 삶을 분석한 것이다. 그처럼 예수님을 기준해서 각자의 삶을 바라보는 영성훈련을 할 때, 말씀이 육신이 되듯이, 성경이 삶이 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다. 성경은 독서를 넘어서서, 말씀이 실체가 된다. 과거에 W(더블류)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 드라마 주제는 만화속 주인공이 실체 세계로 나온다는 설정인데, 과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이 그러하고, 우리가 말씀을 깊게 상고하면, 그 비밀의 통로를 통해서 성경속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집에, 직장에, 친구모임에, 학교에, 교회에, 나에게 나타날 수 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드라마처럼, 레벨 100이 되면 천국의 열쇠를 받게 되어서 엠마에게 건네주면 비밀의 세계가 열리고, 성이 붕괴되듯, 경험을 통한 말씀의 체득과 연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기서 ‘경험’은 곧 ‘말씀을 중심한 경험’을 의미한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내가 느고다” “내가 사명자다” “내가 교역자다” “내가 사역자다” “내가 계시를 받았다” “내가 그 분야 전문가다” “내가 해결할 수 있다”라고 자부하면서, 느고의 입장이 될 때, 항상 요시야에게 강요하고 강압하고 “믿어라”고만 한다. 만약, 예수님이 느고의 입장이라면 어찌 하셨을까? 이 또한 새롭게 연구해볼 분야이다. 예수님은 느고의 문장에서도 영원한 마침표로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였으니, 느고의 문제에 대해서 답안지는 ‘예수님’이다. 성경연구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느고가 옳고, 요시야는 틀리다”가 아니다. 느고도 틀렸고, 요시야도 틀렸다. 또한 느고도 옳았고, 요시야도 옳았다. 모두 부분만 가지고 있다. 모든 정답의 완성은 예수님이다. 그래서 느고도 예수님과 비교하고, 요시야도 예수님과 비교해야한다. 느고와 관련해서 논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의인이지만,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이다. 심판주로서 오셨지만, 심판받는 죄인이 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에서는 홀로 마귀와 싸워서 승리했지만, 이후에서는 항상 제자들과 함께 하고, 더불어 제자들에게 권력(귀신을 물리치는 힘)을 나눠주셨다. 사명자는 이래야한다. 느고는 “내가 사명을 받았으니 막지말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독재를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느고는 자신의 강대국만 자랑했지, 영적인 강대국으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의 입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왜 자신에게 나타났는지도 몰랐으며, 자신이 추구하려는 국익으로서 앗수르와 동맹관계에서 이스라엘이 매우 중요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지중해에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막강한 군사력만큼 지정학적 위치로는 이스라엘이 강했다. 서로 존중받을 입장인 것이다. 결국, 자기 것만 최고다고 할 때, 사명자도 교만의 실수를 하고 실패한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만큼,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상대적 사명자의 도움을 받아야한다. 만년필은 그렇게 뚜겅이 덮여야 만년필이다. 느고가 만년필이면, 요시야는 만년필 뚜껑일 수 있다. 아무리 비싼 만년필도 뚜껑없이는 쓸 수가 없다. 만년필과 만년필 뚜껑은 사명의 짝을 말한다. 느고가 실패한 것은 요시야가 막아서가 아니다. 느고가 요시야의 사명을 몰라서 실패한 것이다. 사명자는 반드시 자신을 도울 상대적 사명자를 알고서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뤄야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도울 사명의 짝으로 세례요한을 알아봤고, 세례요한도 역시 알아봤다. 그렇게 두 사명자는 그 시대앞에 순교의 정신으로 위대한 역사를 열었다. 인류역사속에서 신의 소명을 받고 그렇게 아름다운 평화의 종교혁명을 했던 일이 있던가?
본론으로 돌아가자. 요시야는 병졸(兵卒)로 변장해서 죽었고, 예수님은 죄인으로 변장해서 죽었다. 왕인 요시야는 백성이 되었고, 의인인 예수님은 죄인이 되었다. 모두 죽임을 당했다. 요시야는 순교다. 요시야가 순교당한 것으로 봐야지, 그것을 부정하면 성경의 깊은 맥락을 어긋나게 한다. ‘요시야는 개죽음이다’라고 만약 성경해석을 하면 그것은 너무 위험하다. 종교개혁을 하고, 성전건축을 하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도록 촉구한 왕에게 가혹한 평가의 형벌을 내려서는 안된다. 만약 ‘요시야는 개죽음이다’라고 평가하면, 그 누가 우상타파를 하고, 종교개혁을 하겠는가. 잘함과 못함은 구분해서 평가하는 것이 공의(公義)다.
요시야와 예수님이 다른 것은 무엇인가. ‘부활’이다. 요시야는 죽고 그것으로 끝났다. 반면, 예수님은 죽고 부활했다. 무덤에 묻힌 것은 요시야가 더 화려했고, 예수님은 자신이 묻힐 무덤조차 없었다. 참 슬프게 가난하게 사셨던 청년이었다. 그분의 삶, 닮고싶다. 흠모할만한 것이 없게 초라하게 가신 예수님의 그 삶이 내 흠모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버려진 그 분의 삶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그 모든 아름다움은 졸(卒)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아나 왕(王)이 되셔서 그렇다. 죽음이 슬프지만 기쁜 것은 부활(復活)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간과하는 것중에 하나가 부활(復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이 맞다. 그러나, 다시 사신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가? 지금 땅에 현존하는가? 쉽게 말해서, 비행기타고 가서 알현할 수 있는가? 교황은 문재인 대통령이 알현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이 만났다. 김정은도 문재인 대통령이 만났다. 예수님도 그렇게 만날 수 있는 분인가? 부활후 40일 동안 잠시 출현하시고 사라지셨다. 지금까지 함흥차사 감감 무소식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부활했다고 확신할까? 바로 제자들 때문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외쳐서 그렇다. 이것이 요시야와 예수님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요시야는 죽고 국가는 기울어서 결국 바벨론 포로생활이 시작했다. 종교 지도자가 이래서는 안된다. 자신이 죽으면 대권을 이어서 정책을 마무리할 후계자를 양성해야한다. 그래야 유한한 인생이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예수님의 기독교 역사가 2천년을 살아서 왔던 것도 결국 바톤이 이어져서 그런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가룟 유다도 배제하지 않고 불러서, 성만찬을 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맡긴 그 사역을 제자들에게 넘겨줬다. 살아남은 자는 그 일을 끝까지 완수해야한다.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예수님의 유언은 건네지고, 건네지고, 건네지고, 그렇게 대서양을 건너서 태평양을 건너서 지금 이 시대를 지나고 있다. 종교지도자는 반드시 제자를 양성하고, 성도를 양육해서 자신의 자리를 물려줘야한다. 권력이양을 뜻한다. 종신집권은 종신형(終身刑)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유신헌법은 종신헌법인데,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끝났다. 십자가(十字架)에서 십(十)은 두 팔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씨앗을 뜻하기도 한다. 田은 씨앗(十)을 뿌린 땅(口)을 말한다. 氏(씨)에도 十이 들어있다. 종교 지도자는 스스로 씨앗이 되어야한다. 한알의 밀알이 떨어져 땅속에서 썩어서 없어져야 싹이 나고, 밀알이 열린다. ‘썩어짐’은 곧 ‘내려놓음’이다.
“모든 종교는 종교 지도자가 죽은 이후에 평가된다”
– 설교말씀 요약노트
언젠가 설교에서 들었던 말씀이다. 종교 지도자가 죽었을 때 모든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 그것이 ‘사람성전’을 의미한다.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했다. 또한, 성전건축도 하고, 우상을 타파했다. 또한, 유월절을 지켰다. 반면, 생명성전을 짓지 못했다. 생명성전은 아브라함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의 마침표는 곧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영적인 우상으로 ‘마귀’와 싸워 승리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믿음으로 마귀를 이기라고 했다. 진정한 우상타파는 ‘마귀멸절’이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마귀를 이길 수 있다. 여기서 십자가(十字架)는 예수님의 사역을 상징하며, ‘인자의 권력’을 뜻한다. 마귀는 항상 돈과 물질과 권력과 영광으로 오므로, 그것을 취함으로 마귀의 유혹을 받기 쉽다. 그래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낮아짐의 섬김을 다해야한다. 그것이 신앙인의 기본정신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맞다. 그런데, 예수님만 부활했다면, 그 부활을 누가 외칠 수 있는가? 제자들의 심령이 부활해서, 예수님의 부활도 입증된 것이다. 제자들의 심령이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죄인되심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죄수복을 대신 입고서 죄값을 치뤘다. 예수님이 죽은 것은 가룟유다의 죽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죽음에 해당되는 형벌’로서, ‘돈과 결탁한 종교권력의 타락’을 의미한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았다면, 종교 지도부들은 하나님을 팔고서 정치권력과 결탁했다. 헤롯가문이 그러했다. 현대판 헤롯가문은 김일성 가족이다. 삼위일체 사상의 기독교 말씀을 팔아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는 것으로 삼았다. 그 시대가 그러했다. 로마제국의 부패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로마시민의 3/4이 노예였고, 사람목숨이 동물보다 못한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서 가룟 유다는 ‘정치와 결탁한 종교의 부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예수님은 그 죄인의 옷을 입고서 죄인된 그들에게 십자가형을 받으셨다. 바라바 사건도 주목해야한다. 예수님은 갇혔고, 바라바는 풀려났다. 예수님은 바라바의 옷을 입고서 갇히신 것이다. 의인된 예수님이 죄인된 것은 ‘바라바’의 것도 포함된다. 바라바는 바로 ‘무력투쟁’의 상징이다. 풀려난 바라바는 폭력혁명을 추구한 인물이고, 예수님은 정신혁명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을 원했다. 바라바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무력을 통한 폭력혁명을 바랬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신혁명을 통해 사람의 변화를 촉구한다. 그것이 요시야와 예수님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진보(進步)는 제도를 바꾼다. 눈에 보이니, 그 업적이 엄청나다.
보수(保守)는 사람을 바꾼다. 눈에 안 보이지, 업적이 미비하다.
예수님은 진보가 아닌, 보수의 완성자이다. 요시야왕은 진보적 개혁을 추구했다. 보수와 진보는 상호 보완적이다. 핵심은 사람의 내면적 변화가 가장 중요하고, 성전건축보다 마음의 성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없애는 것보다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권력의지와 음란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천국은 우상을 없앤다고 이뤄지지 않는다. 천국은 마음속에서 마귀를 물리칠 때 비로소 이뤄진다. 마귀는 오직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서 물러간다. 예수님의 복음은 빛이어서 그렇다. 보수의 개혁정신은 ‘나로부터 출발’이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역사에 기록되고, 그 죽음은 왕실에 묻힘으로 업적이 되었으나, 결국 차가운 율법이다. 율법은 돌비에 새겨지듯, 보여지는 성전건축을 추구하고, 보여지는 기념일을 숭상한다. 예수님은 살과 피를 가진 육체로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의 종교개혁은 각 사람의 변화다. 요시야가 예수님을 만나서 ‘보수적 진보의 정신혁명 사상’을 받아드렸다면, 요시야 스스로 하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아버지가 지은 므낫세의 죄로부터,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권력의지를 물리치면서 새롭게 살았을 것이다.
결국, 말보다 실천이다.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 바로 십자가 정신이다. 종교 지도자는 내려놓음을 통해서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다. 스스로 내려놓지 않으면서 내려놓기를 강요하면 그것이 ‘굴종의 모순’에 봉착한다. 모든 내려놓은 자신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위대한 십자가 정신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으나, 하나님이 살리셨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생명성전의 위대함이다. 정신이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으면, 죽어도 살아있다. 요시야는 자신이 죽으니, 모든 것이 끝나고 국가는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반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밀알이 되어서 12명의 제자를 세우고, 12명의 제자는 순교를 통해서 144명의 제자를 세우고, 그렇게 십자가의 다단계는 지금까지 영원하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권력자가 지배하는 구조라면, 예수님의 피라미드는 제자들을 위해서 왕이 졸(卒)이 되어서 마침표로 죽는 것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왕이 백성의 것을 뺏으면, 예수님의 피라미드는 왕의 것을 백성에게 값없이 선물한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라미드는 지금까지 영원하다. 요시야의 죽음으로 영웅이 사라지니 국가는 멸망의 길로 갔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기독교는 부활의 시대를 맞이했다. 세상이 보기에는 카타콤의 지하동굴로 들어가서 200년 남짓 바벨론 포로생활같은 순교의 길을 걷지만, 제자들을 포함해서 500명 남짓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바로 신앙이 부활했다. 신앙적 측면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곧 부활이었다. 멸망이 없었다. 이것이 요시야와 예수님의 근본적 차이다. 그래서 성전건축이나 우상타파(세상비판)보다 자신을 비판하고, 자신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정신혁명을 이뤄야, 진정한 천국의 겨자씨가 될 수 있다. 천국은 씨앗을 세상밭에 뿌리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밭에 겨자씨를 뿌리면서 시작된다.
자신부터 시작이다. 겨자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