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은 몽블랑이 최고다. 몽블랑의 뜻은 아래와 같다.
[지식백과] 몽블랑산은 이탈리아어로는 몬테 비앙코(Monte Bianco)라고 하며, ‘흰 산’이라는 뜻이다.
[지식백과] 몽블랑(MONT BLANC)은 독일의 명품 브랜드로, 알프스 산맥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산인 몽블랑(Mont Blanc, ‘흰 눈이 덮인 산(White Mountain)’이라는 의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흰별은 몽블랑산의 눈덮힌 정상을 상징한다)
볼펜과 만년필의 차이점은 ‘뚜껑’에 있다. 뚜껑 때문에 만년필은 만년동안 쓸 수 있다. 덮었다가 열었다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덮으면 ‘죽음’ 열면 ‘생명’ 2개를 모두 겸비한 것이 만년필이다.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반복하는 것은 사람이 ‘잠과 깸’을 반복하면서 100년의 수명을 이어가는 것과 같다. 만년필이 이렇다. 하나님은 사명자를 보낼 때 만년필처럼 보내신다.
[창세기 2: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서, 하와라고 했다. 부부 개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명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아담과 하와는 부부다. 인생은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맺어준 다양한 인연의 짝이 존재한다. 그러한 짝은 본래 하나였다가 이 땅에 내려오면서 만년필처럼 분리된다. 그래서 만년필은 자신의 뚜껑을 찾는 여행을 시작한다. 이것이 ‘짝을 찾는 여행’이다.
하와는 자신의 짝인 아담의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뱀의 하나님을 따랐다. 뱀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아담도 자신의 짝인 하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결국 낭패를 당했다. 이처럼 만년필은 뚜껑과 함께 존재해야한다. 둘은 결국, 서로의 짝이 되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계획한 그 프로젝트에서 짝이 되지 못하고, 결혼의 부부로만 살아갔다. 만년필은 뚜껑이 덮여야한다. 마치 십자가처럼!!
반면,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달랐다. 사람들은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라고 묻는 질문에서 “세례요한이 의심했다”라고 하지만, “세례요한이 흔들리는 갈대처럼 흔들렸다”라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세례요한이 흔들렸다면, 헤롯왕에게 “내가 실언했소. 앞으로 그렇게 하지 않겠소!!”라고 한 후에, 자신의 목숨을 구걸했을 것이다. 세례요한은 흔들림없이 절대권력의 독재를 향해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것이 신앙의 올바른 자세다. 그와 같이, 예수님도 세례요한처럼 그렇게 순교의 길을 걸으신 것이다.
두 사명자는 하나님이 맺은 만년필로서 짝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세례요한과 함께 그 만년필 뚜껑이 닫힌 것이다. 그래서 그 만년필은 덮였다가 열렸다가 항상 짝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명자를 보낼 때 반드시 짝으로 보낸다. 그 이유는 독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이 여기에 적용된다. 권력을 분리하는 목적은 ‘균형과 견제’다. 하나님은 사명을 분리해서 보냄으로 ‘균형과 협력’을 이루기 위함이다. 누구든지 사명의 짝을 찾지 못하면 뚜껑없는 만년필로 평생 살아야한다. 이것은 낭패다. 반드시 뚜껑을 찾아야 만년필이 만년필로 완성된다.
구약이 만년필이라고 하자. 이미 돌비에 쓰여진 만년필이다. 그 만년필을 덮을 뚜껑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약이 덮힌 것이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은 짝이다. 구약이 문제집이면, 신약은 답안지다. 구약의 모든 인물은 예수님이라는 정답을 통해서 그 오답을 찾아낼 수 있다. 예수님은 정답이고, 구약의 모든 인물은 예수님을 예고한다. 각 인물의 만년필은 예수님이 뚜껑이 되는 것이다. 요시야가 만약 만년필이면, 느고왕이 뚜껑의 사명자일 수도 있다. 무지속의 상극세계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역사이지만, 삶속에서 그렇게 진행될 수도 있다.
‘짝의 사명자’는 어떻게 알아보고, 만나고, 협력할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 하나님의 만년필은 땅이 뚜껑이고, 땅의 만년필은 하나님이 뚜껑이다. 둘이 만나야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의 몸을 입고서 오셨다. 가장 낮은 백성의 신분으로 오셔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서 요단강물에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듯이, 그렇게 낮아져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사람을 얻는 것은 삼고초려(三顧草廬)하듯,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듯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듯이, 예수님이 의인으로서 죄수복을 입고 십자가에 메달리듯이, 그렇게 덕스러움으로 사명자를 얻게 된다. 사명자도 결국 사람이므로….. 하나님도 높은 곳에서 낮아지셨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낮아지지 않고서는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년필이 뚜껑과 싸우면 둘 다 무용지물이다. 인생사 모든 일이 그렇다. 서로 보듬고, 이해하고, 결합하고, 하나되면서 ‘이질적 타자’를 용납할 때 기적의 부활이 만년필처럼 일어난다.
나는 마가를 좋아한다. 사도 바울은 마가를 상당히 싫어했다. 전도여행때 마가가 짐을 짊어져야하는데, 도망쳐서 그렇다. 마가는 젊은 청년이고, 바울은 상당히 나이가 많았는데 짐을 맡은 마가가 업무의 과중함으로 돌아갔으니, 얼마나 고달팠으면 그러했겠는가. 2차 전도여행때 마가를 놓고 바라바와 바울은 크게 다툰다. 그러한 다툼으로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지고 결별한다. 만년필과 뚜껑이 나뉜 것과 같다. 물론, 새로운 뚜껑을 만나서 그럭저럭 사명을 완수하는 사도 바울이지만, 바나바는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내가 마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를 많이 닮아서 그렇다. 언론인으로서, 도망치는 유약함으로, 고뇌와 괴로움과 반성의 자세로서, 기타등등….. 인생은 누구나 마가처럼 도망치고, 돌아오고, 그렇게 아픔과 슬픔과 기쁨과 이해를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사명(使命)도 좋지만, 사명(使命)도 결국 사람의 일이다. 사람 인(人)은 서로 의지하면서 살라고 ‘人’이다. 공자의 최고 가치는 인(仁)이다. 두 사람 사이에 가장 필요한 인품은 ‘어진 마음’이라서 인(仁)이다. 어진 마음은 ‘딱풀’을 말한다. 붙임성있게 이해하고 품고 낮아지고, 중간에서 찌그러지는 고통으로 양쪽을 결합하는 십자가 희생정신이 바로 인(仁)이다. 사람에게는 그렇게 이해하고 품고 낮아지는 ‘덕스러움’이 필요하다. 덕(德)이 곧 진리의 그릇이다. 덕(德)은 行과 眞과 心의 합성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곧 ‘덕’(德)이다. 말씀의 행함이 곧 인격(人格)이다. 잘났든, 못났든 서로 품고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지 않을까? 그리스도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