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쓴 책을 종이책으로 읽는 감동은 신선하다. 언어가 머릿속에 있을 때는 ‘말의 생각’이고, 생각이 입밖으로 나오면 ‘말’이 되고, 생각이 손으로 나오면 ‘글’이 된다. 생각은 창공과 같아서 다양한 문장의 구름을 만드는데, 그 문장의 구름이 땅에 내려오면 글의 문장으로 펼쳐진다. 고뇌와 방황과 두려움과 슬픔과 행복과 감탄과 눈물과 의심과 확신과 놀람으로 얼룩진 몇 달의 기록들이다. 30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20년전에 깊은 영적 경험을 체휼했고, 10년전에 폭풍과 절벽에서 떨어지는 삶을 살다가, 지난해 새로운 경험을 직면했다. 나는 항상 ‘9’에서 변혁한다. 2019년 이렇게 시작한다. 2029년에는 여전히 살아있으려나? 그땐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 함께 가자”는 말씀을 듣고,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랬다. 지금도 뭉클한 감동은 어쩔 수 없다. 아가서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마친 직후를 연결해서 전하신 설교였는데, 잊을 수가 없다.
[마태복음 26: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아가서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죄인의 손에 팔린다’는 문장에 방점을 두고 읽을 때는 ‘일어나 함께 가자’가 와닿지 않았는데, 아가서를 통해서 그 의미를 확인하고서, 문맥을 자세히 읽으니,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나는 겟세마네 동산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마가는 그때 담요를 덮고 있다가 도망쳤다. 베드로는 칼을 꺼내서 종의 귀를 잘랐다. ‘함께 가자’는 그 말씀에 손을 잡은 제자는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은 빈손 그대로 혼자서 갔다. 아, 아프다. ‘닭’의 대명사로서 베드로는 3번이나 부인했다. 한민족에게 닭은 여명의 상징이지만, 성경속 닭은 고통스럽다.
남자친구 14회에서 박보검이 송혜교에게 “우리 함께 서점에 가요”라고 하는데, “일어나 함께 가자”는 성경구절이 ‘훅’ 들어온다. 그렇게 폭풍속으로 손을 잡고 갔어야 했는데, 폭풍속으로 손에 손잡고 갔어야 했는데, 폭풍 그 너머에 있는 천국까지 갔어야 했는데, 아~~~ 나는 지금 십자가의 방향에 있을까? 주님과 함께 가고 있을까?
옛날 교회를 벗어나니, 1990년대에 익숙하게 배웠던 그때 새노래 찬송가가 자주 불러진다. 세상곡에 붙인 그 새노래 버전은 정감있는 노래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