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삶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정의가 추상적이거나, 선언적 명제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9대 대한민국 대통령이지만, 각 개인의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정치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명제는 현대문명이 모두 인지하는 바이다. 각 개인이 삶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예수님의 인격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알아야한다.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이 주인공인 성경을 읽어야한다.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의 행하심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11장]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누가복음 11장 37절 이하로 보면, 예수님이 점심심사 초대를 받고서 바리새인의 집에 갔다가, 손을 씻는 정결예식을 하지 않고서 식사자리에 앉았다가 낭패를 당하자, 역공을 퍼부으면서 바리새파 족속 전체를 저주하는 사건이 나온다. 율법교사가 바리새파를 두둔하자, 율법교사까지 저주를 하면서 심판을 하는 예수님이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초대한 그 바리새파를 봐서라도, 예수님의 지나치심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는데, 왜 예수님은 점심식사를 초대받으시고, 바리새인들의 문화와 풍습을 존중하지 않았을까? 하늘 궁전에서 이 땅에 내려오실 때는 이 땅의 인격, 이 땅의 살과 피를 입고 오셨듯이,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소금과 빛으로 행하실 수도 있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하셨을까? 결국 그 사건이 예수님은 원수로 보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 예수님이 분노하듯, 그들도 예수님께 격노하면서 거세게 항의한 것이다. 축구경기에서 거칠게 몸싸움을 하면 상대편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그날의 식사 초대사건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전제는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이다. 시작의 도입부는 바리새인이 아니다. 말씀잔치를 먼저 연 것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고, 갑자기 무대가 바뀐 것일 뿐, 말씀의 연장선이었다. 그때 바리새인이 생각으로 “정결의식의 중요성”을 말하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쏟아진 것이다. 이 사건은 창세기로 연결된다.
우주창조와 인류창조는 말씀으로 진행되었다. 그때 끼어든 것은 ‘뱀’이다. 뱀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족(蛇足)을 달 듯이 트집을 잡고서, 하와와 아담을 유혹했다. 그 사건과 예수님의 점심밥 사건은 비교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를 하려고 들어갔다가 낭패를 당한 예수님이 그들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고 나오시면서 ‘바리새인의 누룩(외식)’이라고 정확히 지칭했다. 곰팡이가 핀 음식, 상한 음식은 먹으면 배탈이 난다. 조심해야한다. 음식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랴. 뱀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같아도 그 속에 독약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하와와 아담을 죽게 한 것이다. 뱀의 말을 들으면 하나님과 끊어진다. 이단들의 말씀이 도덕적으로 유익하고, 상당한 지식의 창고를 여는 것 같아도, 하나님과 관계를 끊게 하면 뱀의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제자들은 성경속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예수님은 성경의 좁은문이었고, 열쇠였다. 어떤 사명자라도 결국 성경속으로 들어가게 해줘야한다. 성경이 곧 말씀천국이다. 성경을 벗어나서 각종 말을 한다면, 그 말은 성경밖에 있다. 성경이 곧 말씀이다. 성경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이다.
나는 30년동안 다녔던 교회를 떠났다. 이유는 하나다. 교리가 감옥같았다. ‘믿어야만 구원이 있고, 벗어나면 구원이 없다’고 하니, 그 교리가 너무 버거웠다. 마치 ‘말씀을 들어야만 은혜가 있고, 듣지 않으면 은혜가 없다’고 해서 주일말씀을 들었다. 핸드폰을 반납하는 감시의 족쇄를 마음에 채우고 오랫동안 말씀을 들었다. 내 마음에 큰 만족이 없었다. 그러다가, 종교탐방을 통해서 그곳을 벗어나, 지금은 성경속으로 들어왔다. 결국, 말씀의 본질은 성경이다. 왜 요한이 “태초에 말씀이 있었는데,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했겠는가? 구약성경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고, ‘구약성경을 읽어라’는 말과 같다. 그 누구든, 새로운 종교역사를 시작하려면,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와야한다. 구약말씀속에서 예수님이 오셨다.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곧 ‘구약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왔다’는 말과 같다. 대사(大使)를 파견하면, 그 대사의 국적은 파견한 나라이지, 대사가 있는 곳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므로, 그 국적이 천국이다. 그처럼 예수님은 국적이 유대교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모든 말씀은 그러해야한다.
[창세기 2: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아담)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3:1]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세기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세기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의 말’을 자세히 분석해야한다. 뱀은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말라’는 말로서, 본질을 왜곡한다. 하나님은 동산중앙의 실과만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 부분을 전체로 확대해서,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고 과장법을 써서, 하와를 속였다. 첫 번째 뱀의 말에 하와는 속지 않았다. 그 부분에 있어서, 아담이 하와를 제대로 교육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 아담에게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문을 선포했는데, 하와가 뱀에게 설명할 때는 ‘죽을까 하노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을 정녕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하와가 뱀을 교육할 때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뱀이 만약 자식이면, 어쩌랴!! 자식을 교육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흐리멍텅하게 가르치면 나중에 살모사(殺母蛇)처럼 부모를 잡아먹는다. 그게 가인의 존속살인사건이다. 교육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듯이 분명하게 가르쳐야한다. 그래야 뱀이 침범할 수가 없다. 에덴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그곳에서 맘껏 살게 하셨는데, ‘선악과 금지’를 지키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주인됨’을 확인하시겠다는 뜻이다.
모든 시작점, 대전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진행되어야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변경될 수 없는 말씀의 마침표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의 마침표는 십자가로 종결되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를 없애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 같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은 명령이요, 선언이요, 확증이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에덴동산에 살 수 있다.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어야만 낙원동산에 살 수 있다. 그곳에 생명나무가 있다. 이것은 변경될 수 없는 대전제이며, 말씀의 시작과 끝이다.
선악과를 따먹으니, 바로 벌거벗었음을 알고서 무화과잎으로 가렸다고했다. 이성범죄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지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따질 줄 알아야한다. 하와는 바로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뱀의 말을 받아드리면서 선악과를 따먹었다. 뱀의 말을 인정하는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것과 직결된다. 이후로 벌어진 것은 선악을 인지하는 것에 하와와 아담이 알았다고 창세기는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의 행함이다.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것, 그래서 무화과잎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린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사귀면 잘 보이려고 한다. 잘 보이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부끄러운 곳을 가리는 것이다. 직장을 신처럼 받드는 직장인은 그 회사에게 잘보이려고 양심에 부끄러운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이단에 푹 빠진 광신자는 양심에 부끄러운 짓도 서슴지 않고 행한다. 모두 무화과잎으로 가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설교는 성경을 읽고싶게 하고, 이단의 교주는 성경을 읽지 않게 한다. 성경속으로 안내하는 인물이 성경의 사람이며, 말씀의 주인공이다. 성경이 곧 예수님을 증거했다. 그처럼, 하나님이 보낸 자는 성경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성경을 벗어나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루터조차 교황을 질책하길 “교황이 성경해석은 자유롭게 할 수 있어도, 성경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고 했다. 오직 성경속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선악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이며, 이는 선악지식의 나무를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선악지식의 나무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서 발생한 것은 바로 ‘생명나무의 배제’이다. 선악지식의 나무가 되어서,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길을 걸었던 것이다. 선악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않는다는 것은 선악의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래야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가 있다.
돈으로 선악을 판단하면, 가난한 자는 무화과잎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린다. 부유함이 어디서 왔는가? 왕후장상의 씨앗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다. 재벌의 아들이 부유한 것은 상속제도때문이지, 자신의 잘남으로 된 것이 아니다. 부유함과 가난함은 제도가 만들어놓은 선악의 기준이다. 100년 인생이 살면서 자본주의 선악기준은 효력을 미치지만, 영혼에는 무익하다. 가난함도 부유함도 결국 무화과잎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쳐다보면, 하나님께 선악의 판단을 맡기면, 하나님께서 사는 동안에 다양한 역사를 펼치신다. 지식의 권력도 동일하다. 지식의 바벨탑을 쌓으면 하나님이 허무신다. 정치권력도 마찬가지다. 지식의 권력은 도덕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고, 정치권력은 ‘힘’과 ‘군중’을 선악의 기준으로 삼는다. 과연 그럴까? 선과 악은 하나님이 기준이다. 뱀의 말에서 ‘하나님처럼 될까봐’라고 유혹하고 있다.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고싶어서 선악지식의 열매를 먹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자신이 하나님이 된다는 것,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마음대로 자유롭게 산다는 것, 그것은 달콤한 것 같지만, 그 자유가 결국 멸망으로 간다. 하나님앞에서 가장 자유롭다. 그것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다. 십자가는 구약의 마침표이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그 죄악을 끝내기위해서 십자가의 도(道)로서 재창조의 새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처럼 버려짐을 당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은 새롭게 약속을 받게 된 것이다. 계약의 갱신(更新)은 십자가를 통해서 말미암았다. 그것을 누가 부인하랴!!
‘선악과’를 여성의 생식기로 풀이하면, 왜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서 임신했을까? 하와도, 아담도 선악과를 따먹었다. 성경을 깊게 읽어보면, 비유의 내막을 알 수 있다. 설령, 남녀의 그곳이라고 풀이하더라도, 과연 그것을 참는 것이 하나님께 의로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남자가 여자를 가까지 하지 않고, 여자가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서, 돈과 쾌락과 권력을 남자삼아 사랑한다면, 그 속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령의 따뜻함과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지 않고, 뱀의 악독이 가득하다면,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그 순결이 오히려 추악이 된 것이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다. 율법은 곧 사람이 정한 제도의 형식이며, 외식을 뜻한다. 바리새인이 초청한 점심식사에서 예수님이 강하게 비판했던 그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완성을 논한다면, 과연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고, 그 제자들도 그 길을 걸어가셨다. 변화의 시작점은 예수님이고, 첫 단어의 주어가 되신 예수님을 따라 제자들도 십자가의 문장을 이뤘다. 이것이 제자의 도리다. 그리스도의 행함은 믿는 모든 자에게 동일한 효력을 발생시킨다. 내가 30년 있던 곳은 그가 10년의 감옥생활을 하고 나오셨지만, 따르는 자들은 감옥에 가는 것을 싫어한다. 여기서 ‘감옥’은 ‘배제와 억울함과 부당함’의 감옥이다.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각자 자신의 교회에서 생활속에서 그렇게 감옥에 살 듯, 배제됨으로 주변을 자유케하고, 가난한 감옥에 처함으로 주변을 풍요케하고, 침묵으로 성도가 말하게 하고, 자신의 낮아짐으로 성도를 높여야할 것이다. 높은 자들은 높은 직위를 유지하면서, 낮은 자들이 높아지는 꼴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들은 누가 누구를 감옥에 넣었는가?
나에게 돌아오라고 한다. 어리석은 요청이여!! 내가 떠난 그 이유가 그대로 존재하는데, 내가 어찌 돌아가리요!! 내가 떠난 이유를 고치지 않는다면, 제2의, 제3의 벗어남이 있지 않겠는가!! ‘그곳을 벗어나면 구원이 없다’는 그 두려움 때문에 거기에 있었건만, 그곳을 벗어남으로 비로소 구원을 얻었다면, 어쩌랴!! 그러므로, 신께로 돌아감이 모든 인생의 바른 길이다. 사람들은 자신은 책임지지 않으면서, 자신은 속으로 별의별 생각들을 하면서, 정작 부당한 모순을 발견하면, 그것을 ‘용납과 침묵’으로 허락한다. 이 침통한 모순이여!! 언제 뱀의 말을 허락하라고 했던가!! 옳지 않음을 관용으로 용서함은 마땅하나,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옳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틀림을 알았으므로, 각자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진실한 신앙고백이다. 한 사람이 죽어도 슬퍼할 줄 모르는 그 비참함은 내 자신의 초라한 초상이다. 십자가의 은혜가 없었다면, 이 슬픈 인생을 무엇으로 견디리요!!
내가 그곳에 있을 때는 “신앙칼럼을 쓰지 말라”고 하더니, 이제 나오므로 비판의 칼럼을 쓰니, “비판칼럼을 쓰지 말라”고 하므로, 결국 ‘쓰지 말라’는 것에 마침표가 찍힌다. 그냥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말하지 말고, 글쓰지 말고, 침묵속에 살라는 것이다. 무엇이 옳든, 무엇이 틀리든, 판단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살라는 것이다. 말씀을 기준해서 살아야 옳다. 이 세상은 도처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성경말씀을 기준해서 봐야하고, 사람을 분별할 때는 예수님을 중심해서 봐야한다. 말씀과 말씀의 주인공을 인류가운데 표본으로 보여줬으므로, 그것을 기준해서 분별하면 옳고 그름이 보이는 것이다.
성경말씀에 따라서 믿는 바를 스스로 판단하고, 자신을 자아비판하면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다. 숨는 것이 잘못됐다. 변명도 구차하다. 아담과 하와는 나무뒤에 숨고, 무화과잎으로 가리고, 아담은 하와뒤에, 하와는 뱀뒤에 숨었다. 그렇게 숨고, 가리고, 변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냥 있는 그대로 모두 벌거벗겨진채로 드러내야한다. 십자가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해서 하루 하루를 알차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 외에 무엇이 중요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