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자리에서 엄청나게 떠든다. 지금까지는 “내가 글을 쓰는 데 정말로 힘들다”라고 했는데, 오늘은 예수님의 세족식 말씀을 읽으면서, 포용과 이해를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글을 쓰는 것이 너무 좋아서 이해했다. 그랬더니, 이 분들은 오히려 내게 “이해부탁해요”라면서 “아메리카노 드실래요”라고 한다. 어떤 모임인데, 나에게 들어오라고 한다. 이 모임 참 신실하다. 왁자지껄하는 서로 형식도 없고, 교만도 없고, 잠시 인내하고, 참는 것으로 배제가 포용이 되는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된다. 비판의 배제는 편(便)을 가르고, 이해의 포용은 원수도 친구가 되게 한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괴롭힌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싫다고만 볼 것이 아니다. 가령, 예수님은 유대교에게 상당히 곤혹스런 존재였다. 예수님을 확대하면, 사마리아인과 같았다. 특권의식과 선민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은 ‘창녀’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처럼 버려진 존재가 하나님이었으니, 어쩌랴!! 인생은 비판의 존재가 때로는 구원의 비밀일 수도 있다. 내게도 동일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경을 깊게 묵상하는 것이다. 내 옆에 이렇게 떠드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나는 마음속에 평안함을 누린다. 세상의 불편한 소리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한다. 격동의 소리속에서도 하나님의 소리가 존재한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한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듣다보니, 하나님의 소리가 동산에 들리니 나무뒤에 숨는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데 왜 숨는가? 하나님의 소리에는 숨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주지 않는다.
나와 다르다고, 나와 틀리다고, 나를 괴롭힌다고, 그 소리를 무작정 반대해서는 안된다. 비판도 때로는 살과 피가 된다. 그리하여, 나를 비판하는 소리속에서도 나를 비판하는 묵시로 받는다. 그와 같이 사람들도 그러하길 간절히 요청하면서, 오늘의 하루를 보낸다. 이해함으로 옆좌석의 모임을 정죄하지 않으니, 내게 아메리카노를 주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물며 하나님이시랴.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옆테이블에 앉아 계신다.
인류역사속에서 가장 복장터지게 떠든 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다. 사람들이 귀머거리니까, 하나님이 복장이 터진 것이다. 그러다가, 성경을 뚫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아!! 인격의 하나님, 오늘도 내 옆에 오셨나?
옆 테이블 참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