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교육에서 1등하는 법만 배웠다. 꼴등은 숨기라고 배웠다. 왜 꼴등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을까? 지는 법은 왜 못 배웠을까? 이기는 법만 배우다보니, 지는 자리에 서는 것이 낯설고, 실패같고, 참담하다. 지는 법을 배웠더라면, 지는 것이 이기는 십자가의 도(道)을 배웠더라면, 인생을 좀 더 알차게 살았을 것을…. 꼴등도 1등일 수도 있음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내려오셨다. 백성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왕족이었고, 동방박사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평생 도망자처럼 죽음의 사선에서 사셨다. 결국, 십자가에서 사형수로 죽었다. 이 세상에서 기록은 그것이 끝이다. 좀 더 비참한 현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마저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죽은 육체까지 도난당했다는 사실은 비극의 비극이다. 비극이 희극인 것은 오직 부활의 주님덕분이다. 도난당한줄 알았던 예수님의 시체가 부활의 몸으로, 더 완전해진 몸으로, 그렇게 살아있었다니….. 예수님의 육체는 예수님이 가져가셨던 것이다. 나는 육체가 영체로 살아났음을 믿는다. 그래서 그 육체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지는 법과 꼴등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한다. 1등하는 경우는 로또처럼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대부분 져야하는데, 지는 것을 받아드리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훈련하지 못하고, 좋게 여기지 못하니, 인생의 대부분이 불만족과 불행의 연속이다. 왜 1등을 해야만 하는가? 1등만 행복하면, 달력은 1월 1일만 행복할까? 우리는 365일 중에서 1월 1일만 행복하고, 나머지는 불행해야하나? 1등은 이렇게 슬픈 것이다. 결국, ‘1등을 해야한다’는 그 경쟁철학이 잘못된 것이다.
마을회관에서 친구들끼리 서로 이기겠다가 닭싸움을 하다가, “밥먹자”고 어머니가 부르시면,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인생은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야한다. 이 땅을 떠난 그 어딘가로….. 해가 서산에 기울 듯 인생은 영원한 집으로 가야한다. 1등을 해봤자, 그 성적표는 이 땅에서 잠시 쓸모있을 뿐이다. 나보다 남을 위해 살아주고, 남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고, 창조주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면서 하루하루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 가난한 농부의 마음으로 착한 심령을 주변에 씨앗으로 뿌리면서, 소금처럼 주변을 썩지 않게 희생하면서, 그렇게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꼭 1등을 해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꼴찌를 해도, 십자가를 져도, 억울하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참는다면 그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그렇게 살다가 인생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드라마 SKY캐슬에서 한서진(염정아)이 김주영이 범인인 것을 알고서 찾아갔으나, 오히려 김주영이 한서진에게 “딸이 서울대에 가길 원하면 숨죽이고 있어”라고 하니, 한서진은 침묵으로 결탁한다. 마태복음 4장 예수님의 3대 시험에서 3번째가 생각났다. 예수님은 절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귀영화를 주는 ‘마귀의 범죄’를 눈감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뇌물을 받거나, 자신의 이권과 연결되면, 사람은 누구나 범죄에 결탁한다. 그 때 과연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양심선언을 할 수 있을까? 염정아는 결탁함으로 범죄자에게 절을 한 것과 같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누명을 썼다. 예수님도 동일했다. 마귀에게 절하지 않자, 마귀가 예수님께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이다. 신앙인의 양심을 지키면서, 십자가를 가슴과 삶속에 깊게 새기면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