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3장 1~4]
1.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들은 말한다. 너무 신앙에 신경쓰지 말라고, 혹은 성경보다는 세상 소식에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그러나 성경은 영원한 진리다.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듯이 모든 책들은 성경을 중심해서 존재할 뿐이다. 인문학 도서들은 화성과 목성사이에 편만히 흩어진 23만개 소행성과 같다. 나는 날마다 성경을 읽고, 거울에서 나를 발견하듯 성경에서 주님을 발견한다.
누가복음 13장 1절에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이 모호하다. 전체 문맥으로 보자면,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단에 뿌렸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인신제사를 한 빌라도’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다른 번역판을 통해 분석하면, 제사를 지내던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내용이다.
[새번역]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예수님의 반응에 주목해야한다. ‘죄’(罪)의 본질을 묻고 계신다. 우리는 누군가 처벌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이 죄의 형벌로 그리 되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욥의 친구처럼, ‘죄=형벌’의 인식이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무슨 죄 때문에 그러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의 죄”에 대해 이야기하신다. 자신부터 생각해야한다.
미투 운동이 벌어졌다. 네이버 실검에 하루에도 수십개의 핫이슈가 떠오른다. 슬픈 비극의 비보가 쏟아진다. 학살소식과 붕괴소식과 충격소식이 네이버 곳곳에서 화산처럼 폭발한다. 그러한 사건을 통해서 믿는 신앙인들은 그들의 죄를 부검할 것이 아니다. 자신을 돌아봐야한다. 그들이 혹여 희생제물이 되어서 그리 되었을 수도 있다. 혹여, 비판한 그 사람의 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 겸허하게 엎드려 자복하는 신앙인의 미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욥이 모든 것을 잃고, 실패하고, 신앙마저 위태로웠을 때, 욥의 현실이 형벌의 명백한 증거라고 친구들이 말했을 때, 욥은 그러한 고난의 형벌로 주님을 더욱 몸으로 알아가는 기회로 삼았다. 사람의 신앙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누가 옳고 틀림은 하나님이 판단하신다.
[누가복음 13장 6~9]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학살사건과 실로암 망대 붕괴사건은 ‘계시와 암시’로서 각 개인에게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는 경고장이며 독촉장인 것이다. 세상뉴스, 실검뉴스는 읽는 독자에게 배달되는 신의 독촉장이다. 겨자씨는 각자 마음밭에 떨어져야하는데, 말씀의 겨자씨는 떨어지지 못하고, “남이 어떻다. 누가 나쁘다”는 비난과 악평과 불만의 가시덤불이 가득차므로,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자신의 마음밭 상태가 어떤지를 확인하고, 매일 쏟아지는 ‘회개의 독촉장’을 받고서 그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한다.
결국, 학살사건과 실로암 망대 붕괴사건은 갈릴리 사람들로 구성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게도 독촉장이 배달되었다. 그것이 겟세마네 동산이다. 인생은 언젠가 죽음을 직면해야한다. 그 죽음이 겟세마네 동산이다. 그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다. 오로지 예수님만 제자들의 죄값을 대신 짊어지고, 그 시대의 죄값을 대신 짊어지고, 희생제물이 되어서 빌라도에게 학살을 당하고, 십자가의 망대를 세우신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40년 후에 유대인 학살과 예루살렘 붕괴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사건은 400년 후 기독교 순교와 로마제국 멸망으로 이어졌다.
세상뉴스는 멀리서 밀려오는 밀물과 같아서 때가 되면 자신의 발등까지 차오른다. 도망쳐도 쓰나미처럼 덮친다. 그때가 오기전에, 회개해야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학살사건과 망대 붕괴사건을 통해서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을 하셨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이 전한 말씀과 같다.
[누가복음 3장 7~9]
7.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아!! 세상 나쁜 소식에는 격분하면서, 나의 은밀한 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내 인생의 무참함이여!!
모든 나쁜 소식은 나에게 배달될 미래의 독촉장임을 명심해야한다. 남 일이 아니다. 내 일이다. 그래서 주님께 붙어야한다. 회개해야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듯이,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인생을 겸허하게 살아야한다.
내가 30년 있었던 곳은 심정의 십자가를 진다고 말하는데, 누구도 말의 십자가만 질뿐, 심정의 십자가는 선생에게만 맡기고, 10년형을 살게 했다. 입으로만 ‘심정의 십자가를 졌다’고 하면, 그것으로 OK가 되었다. 왜 교회에서 배제되는 감옥에 처함으로 성도들에게 자유를 주는 지도자가 없을까? 나는 떠남의 감옥에 처해져, 결별과 삭제의 길을 택했다. 여러 사람들이 내게 전화한다.
그때마다 나는 말한다. “제자라면 선생이 간 십자가의 길, 감옥의 길을 실천함으로 교회안에서 낮은 감옥에, 어두운 감옥에, 배제의 감옥에, 고통과 상처받는 사람을 포용하는 감옥에 처해서 살아가라고, 감시하는 교도관이 되지 말라고, 무서운 형벌을 선고하는 판사가 되지 말라고, 그래서 나같은 사람이 더 이상 떠나지 않는 이상세계가 되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