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목사님이 내게, “분서갱유해요”라고 권면했다.
사상의 자유 시대에 “분서갱유”라는 사자성어가 나는 묶었다. 분서갱유당했던 사건도 몇몇 생각났다. 순간, 십자가가 떠올랐다. 주님은 성경과 모든 사건과 인생의 답이 되시므로, 주님도 분서갱유당하셨음을 알게 됐다. 태초의 말씀이신 주님께서, 성경을 믿는 독자인 유대인에게 매장당한 것이다. 영화 미저리처럼. 책은 작가의 창작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뜻대로 구원하고 섭리한다. 특권종교가 열성팬으로 하나님을 독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서갱유되실 분이 아닌데, 잘못된 바리새인의 누룩때문에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감염되어 분서갱유되셨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깊은 진리를 깨닫고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다. 세상 모든 철학은 열쇠같아도 열쇠처럼 생긴 자물통에 불과하다. 지식이 유용한 유일한 이유는 진리를 담았을 때이다. 지식이 뱀의 말을 담으면, 선악과를 따먹듯 하나님까지 판단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배우고, 익히고, 자신을 깨닫게 하는 영혼의 거울이다.
지금껏 분서갱유당하는 분노에 대해서만 생각했는데, 분서갱유당하신 주님의 의로움에 대해 생각하고, 내 사상의 자유스러움에 있어서도 반드시 분서갱유해야할 가시덤불 인본이 많음을 시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