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도 꼭꼭 씹어 먹고, 드라마도 깊게 보고, 백화점에서 옷을 살 때도 브랜드와 색상과 가격과 원단과 디자인을 자세히 따지고 구매하는데, 유독 성경을 읽을 때는 라면먹듯 후루룩 먹는다. 잘못된 성경읽기 식습관이다. 성경은 진리다. 깊게 소화하듯, 성찰하고, 연구하고,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비칠 정도로 생각하면서 읽어야한다. 최소한 성경의 사연이 비쳐질정도로 내용과 문맥이 파악되고, 쓴 저자의 의도가 보일 정도로 들여다보면, 그때 하나님의 생각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자신도 보이고, 주님도 보인다. 참으로 신비한 성경의 거울이다. 말하는 거울은 백성공주의 동화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조금만 집중하면 성경이 바로 진리의 거울이다.
누가복음 12장은 정말로 길다. 2개로 쪼개도 길 것 같다. 격동의 시기를 보내는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사연을 엿볼 수 있다. 누가복음 13장은 빌라도 ‘학살사건과 예루살렘 망대 붕괴사건’을 통한 예수님의 교육방식이 있다. 예수님은 외부의 사건을 접하면, 그것을 가십거리로 삼지 않고, 거울로 삼아서 자신의 제자들을 교육했다. 그리고, 오늘 읽은 18년 귀신들린 여인을 고친 내용이 나온다. 회당장은 거드름을 피우면서 갑질을 하는데, “6일동안 고치면 될 것을, 왜 안식일에 고치느냐”고 하는데, 18년동안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준 사람이 없었으니, 회당장의 말에 모순이 많다. 예수님이 ‘희생제물의 풀려남’을 비유하면서 18년 귀신들린 여인을 비유하니, 2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반대하여 부끄러워하는 자들, 나머지는 영광스럽게 기뻐하는 자들이다.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여전히 사탄에 매여있어서다. 창세기에서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서 자신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했다고 했다. 하나님의 소리에 자신의 내면이 투영된 것이다. 또한 회개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이 된 것이다.
18년 귀신들린 여자가 고침을 받은 사건 이후에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와 ‘좁은 문’ 비유가 바로 이어진다. 전체 맥락을 통해서 이해하면, 18년 귀신들린 여자가 바로 겨자씨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아주 사소한 그 사건이 겨자씨처럼 천국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천국을 겨자씨처럼 시작하시지, 겨자밭으로 시작하지는 않으신다. 회당에는 회당장도 있었고, 바리새인들도 있었고, 수많은 무리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18년 귀신들린 여자를 고치면서, 그녀가 사탄의 매임에서 풀려남을 선언하신다. 이것이 천국의 시작점이다. 겨자씨같지만, 한 인생에게 생명이 부여되는 순간이다.
모든 육체는 정자와 난자의 ‘사람씨’가 결합해서 생명체가 되듯이, 모든 영혼은 사탄에서 풀려남으로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게 된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그것이 천국이다. 북한의 개방정책보다 탈북자 1명이 천국의 시작점이다. 통일은 탈북자 1명의 겨자씨에서 시작하는 것이지, 북한과 남한의 통일협약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탈북자를 품지 못하면서 어찌 북한을 품으랴!! 우리는 이 세상이 천국으로 변화되길 바란다. 천국의 씨앗인 예수님이 ‘탈북자의 이방인’과 같다. 탈북자를 이해하고 용납하면, 그곳에는 휴전선도 없고, 이념도 없는 평화의 한반도가 된다. 그와 같이,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용납하고 이해하면, 천국이 시작된다.
겨자씨와 누룩비유는 상당히 대조적인데, 누가는 2개의 비유를 동시에 사용했다. 18년 귀신들린 여자가 고쳐진 이후에, 그 사건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을 표현한 것이다. 한 사람의 돌이킴이 간증을 통해서 모든 교회에 은혜를 주는 것, 천국은 겨자씨에서 시작해서 금방 겨자밭이 된다. 누룩같다.
‘좁은문’은 예수님을 말한다. 영화관도 문을 통해서 들어가고, 아파트도 현관문을 통해서 들어간다. 문을 열면 내부가 펼쳐진다. 모든 문은 어딘가로 연결된다. 그래서, 그 문이 어떤 집의 문인지 자세히 확인하고 파악해야한다. 천국에 가길 원하는데, 실상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 예수님과는 비교될정도로 그곳이 화려했고 명예롭고 튼튼하고 넓었다. 권력의 천국은 로마황제와 빌라도와 헤롯대왕이 강했다. 예수님은 좁은문처럼, 겨자씨처럼, 아주 작았다. 그러나, 좁은문을 열면 그곳에 하나님이 계셨고, 천국의 궁궐이 있었으니 세상에서 볼 때는 좁은 문이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세계가 있었다. 외부에서 보여지는 것보다 내부에 무엇이 있느냐를 항상 파악해야한다. 좁은문은 ‘작은 문’의 의미도 있지만, 좁은문속에 누가 있느냐를 알아야한다는 의미도 있다. 예수님이라는 문을 열면 그안에 하나님이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의 좁은문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