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간혹 십자가의 본질을 혼동한다. 십자가는 ‘작은 씨앗’이다. 그 씨앗을 뿌리지 않고서, 큰 결실을 거둘 수는 없다. 결실을 거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로마제국의 몰락은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순교후 300년이 지나서 기독교를 공인하고, 얼마후 몰락했다. 긴 세월이 걸렸다. 게다가 로마제국이 몰락함으로 천국이 이뤄진 것도 아니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내 삶의 겨자씨다.
인류의 운명을 놓고, 마지막 길을 가야할 주님께서 하셨던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생이 보다 주목할 겨자씨가 분명히 보인다. 인생은 결국 자신의 삶에 책임지고, 작은 일을 소중히 생각하며, 밥알 한톨의 정성으로 살아가야한다. 일확천금을 꿈꾸겠지만, 인생은 겨자씨로 살아가고, 그 겨자씨가 싹을 내고, 줄기를 뻗어서 나무가 되듯이 아주 서서히 천국이 온다. 사도바울만 해도 다멕섹에서 돌이키고 엄청난 빅 이슈가 되었으나, 16년이 지난 후에야 ‘쓰임의 나무’가 되었다. 인생은 이런 것이다.
인생은 노인과 바다처럼 고래를 잡아서 주님께 큰 공적을 세우고 싶어한다. ‘공적’은 은혜앞에 작은 동전일 뿐이다. 공적을 세우기에 앞서서, 과연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고, 깨닫고, 감사로 살고 있는가? 어디서 허덕이면서 살고 있는가? 마음밭에 천국의 겨자씨가 있는가? 성전세를 내야한다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자, 예수님은 겨자씨만큼만, 정확히 성전세만큼만 물고기의 기적으로 허락하셨다. 반세겔은 5만원인데, 베드로의 5만원까지 포함해서 10만원의 물고기 표적으로 허락하셨다. 제자 공동체가 모두 10명인데, 다른 제자들도 성전세를 내지 못했을 것인데, 예수님의 행하심은 당신에게 주어진 그 일상의 책임에 최선의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향유옥합을 부었던 마리아도 두둔하셨던 예수님이다. 향유옥합은 대략 3천만원 정도 가치가 있다. 예수님은 ‘경제개념’에 있어서, 돈으로 말씀사역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전혀 먹지 않았음을 언뜻 엿볼 수 있다. 너무 급박한 시대를 살다가셔서 그러하셨을까? 향유옥합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서 그랬을까? 사건의 전체 맥락을 통해 자세히 확인하면, 결국 사람의 마음을 ‘향유옥합’으로 보시는 주님이시다. 겨자씨가 작지만, 그 속에 진심이 들어있으니,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순교의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생활속에 십자가를 얼마나 앞세우며 살아갈까? 십자가는 너무 무거워서 앞에 세울 수가 없다. 짊어지면 고개가 숙여지고, 등이 구부러진다. 높아질 수가 없다. 겸손함, 낮아짐, 인자의 권력을 우리는 얼마나 행하면서 살아갈까? ‘인사하기’와 ‘경청하기’와 ‘인정하기’로서 십자가의 도를 실천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주 작은 겨자씨 십자가를 권해본다.
누군가를 생각할 때 비판과 분노가 치솟을 때, 나는 기도로서 분노의 대상에게 정성과 사랑과 은혜를 간구했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으니, 나는 정녕 그러했다. 그리고 비판과 분노를 내 마음에 쏟았더니, 놀랍게도 나의 분노는 스르르 사라졌다. 상대를 향해 분노할 때는 화산이 폭발하는데, 그 분노를 나에게 쏟으니 내 마음밭이 개간되어서 겨자씨가 잘 자란다. 놀라운 주님의 농사법이다. 십자가의 도(道)에 무릎을 꿇는다. 누군가 나를 향해 분노와 저주의 기도를 할지라도 나는 성령과 주님이 계시므로, 평안을 누리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