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罪)는 새가 그물에 잡힌 모양이다. 범죄(犯罪)는 “죄를 범했다”는 뜻이다. 개는 사람을 물 수 있다. 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가 사람을 물기까지 개를 벌할 수 없다. 개가 사람을 물면, ‘개새끼’가 되고, 개는 범죄한 것이다. 범(犯)에 개(犬)이 들어있는 이유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생각과 행동으로 죄를 지어야 범죄가 된다.
원죄(原罪) 유전죄(遺傳罪) 연대죄(連帶罪) 자범죄(自犯罪)가 있다고 언젠가 배웠다. 한문의 뜻으로 풀이하면, 원죄(原罪)는 근원의 죄로서 창세기 범죄를 말하는데, 더 깊은 근원은 마귀다. 예수님의 3대 시험은 죄의 근원인 마귀와 전쟁이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범죄를 원죄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유전죄와 연대죄는 시간의 개념이다. 유전죄는 상속재산처럼 죄가 유전된다는 것이다. 혈통죄, 가문죄 등등이다.
연대죄는 연결해서 묶인 것이다. 한국 축구대표가 이기면 한국인은 누구나 기쁘고 행복하고, 고종이 왕권을 뺏기니 조선의 백성은 일본의 종이 되듯이, 같은 시대에 같은 팀끼리 받는 형벌이다. 연대죄는 같은 시간대에 같은 소속끼리 묶여서 받는 것이다. 자범죄는 혼자서 지은 죄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예수님의 승리가 각자의 승리가 된다. 예수님이 죄의 근원인 마귀를 이겼기 때문이다. 만약,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죄에 속해서 마귀편이 되므로 향락과 부귀영화를 얻을지라도 예수님께 패배한 자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편이 되어야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연대하는 것이다.
얼마전 10% 시청률대를 기록하면서 종영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현빈이 레벨 90이 되므로 마스터 권한을 얻었다. 현빈이 허락하면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다. 동맹이 되면 적이 같아진다. 더불어 무기도 공유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동맹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삭제된다.
예수님은 복음서 곳곳에서 ‘죄의 소멸’과 ‘용서의 은혜’에 대해 많이 언급하셨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현빈은 모두가 반대해도 게임만 했다. 게임을 통해서 레벨을 상승해, 게임의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것만이 자신의 목적이었다. 예수님도 그러했다. 마귀퇴치를 통해 지상천국 건설이 예수님의 목표였다. 결국, 현빈은 자신이 죽음으로 게임의 바이러스를 잡았고, 게임세계는 정상이 되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다.
예수님은 ‘정죄의 범죄’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말씀하셨다. 정죄(定罪)는 ‘죄를 단정하는 것’이다. 가령, 누군가 누구에게 “너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 멸망받을 인간이다, 하나님의 저주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판단했다면, 그것이 정죄함이다. 정죄의 범죄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라서 인식의 우상범죄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사마리아 민족과 이방인을 향해 정죄의 범죄를 지었다. 비난과 비판의 껌씹기를 즐겨하면, 정죄하는 늪에서 쉽게 탈출하지 못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정죄의 범죄로 결국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주 예수님까지 죄인취급해서 사형수로 죽였다. 미래를 예견하고 시대를 개척하라고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도 목을 잘랐다. 정죄함은 정말로 경계하고, 조심해야한다.
야곱은 간발의 차이로 형에게 1등 자리를 뺏겼다. 그것이 장자권이다. 뺏겼다는 그 상실감으로 축복권의 경쟁에서 형의 장자권을 속여서 뺏었다. 그 뺏음으로 에서를 ‘제2의 야곱’으로 만든 것이다. 뺏으면, 뺏긴 쪽은 상실당한다. 결국, 형은 다시 뺏기위해서 동생을 죽이려고 하니, 도망자가 되었다. 야곱은 자신이 뺏긴 것만 생각하고 뺏기에만 혈안했다. 상대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도, 자신을 속인 라반에게 화풀이, 분풀이만 할 뿐, 자신이 속였던 아버지에 대한 참회는 없었다. (있을 수도 있으나,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에서에게 비교당하는 야곱은 항상 찬반과 푸대접과 왕따와 버려짐이었다. 그런데, 야곱도 라헬을 보다 사랑하므로 레아를 버렸다. 자신이 당했던 치욕을 그대로 가족사에 적용한 장본인이 야곱이다. 나중에는 자녀까지 차별대우했다. 요셉만을 채색옷으로 입히면서, 그 요셉을 구렁텅이에 빠지게 했다. 이복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다고 하지만, 그러한 분쟁과 시기의 씨앗이 야곱의 편애에서 출발한다. 야곱이 요셉을 지나치게 사랑하므로, 그러한 편애가 이복형제와 차별을 주었으니, 그러한 차별이 바로 ‘멸시의 늪’이다.
정죄(定罪)는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을 비교해서 폄하하고, 차별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인식의 정죄는 스스로 판사가 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은 하나님께 있다. 선악을 스스로 분별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가능하다. 말씀을 배제하고, 도덕의 가치로만 선악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또한 자신의 감정으로만 선악의 가치를 판단하면 그것도 위험하다. 도덕과 감정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과 사건을 바라봐야한다. 그 누구도 죄인을 죄인으로 정죄함으로 의인이 될 수는 없다. 의인은 죄를 짓지 않음에 있지 않고, 죄를 자각하고 회개함으로 가능하다. 죄인을 죄인취급하는 것은 정죄의 범죄를 짓는 이중범죄다. 누군가의 어떤 범죄 사실을 알았다면, 그 사실의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봐야한다.
우리는 인식의 경찰이 되면 절대로 안된다. 경찰(警察)은 경계할 경(警) 살필 찰(察)이다. 경찰의 업무는 죄인을 잡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죄인을 잡지 않고, 죄의 그물로 사람을 잡아서 죄인으로 만든다. 무서운 집단이다. 그들은 모든 사람을 의심함으로 잠정적 죄인으로 취급한다. 그것이 피의자(被疑者)이다. 의심의 주체는 경찰이다. 심문조서는 죄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죄의 늪에 빠지도록 시나리오가 그물처럼 짜졌다.
피의자가 죄인이 되어야만, 경찰은 공적을 받는다. 경찰은 죄의 그물을 가지고, 죄의 옷을 가지고, 누구든지 죄인으로 만들길 원한다. 얼마나 무서운 족속인가? 인식의 경찰은 모든 사람을 정죄함으로 범죄자로 취급한다. 정죄함을 즐기는 자들은 인식의 경찰이다. 창세기 사건에서 하나님이 사건을 조사하자, 아담은 하와에게 죄가 있다고 했고, 하와는 뱀에게 죄가 있다고 했다. 자신이 자신을 보는 ‘자각의 거울’을 갖지 못한 것이다. 남의 죄를 찾다가 정죄의 범죄를 짓게 된다. 당랑재후(螳螂在後)처럼 남의 죄를 찾는 그 순간 뒤통수를 쳐다보는 다른 존재가 있으니, 바로 하나님이다.
오직, 변호사(辯護士)처럼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자신의 미세먼지같은 죄도 자복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어야한다. 그래야 마귀의 경찰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다. 혹여 내게 대학에 갈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나는 법률학을 배워서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작은 꿈이 있다. 이런 이유다.